[특별기고]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지난 9일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대한지질공학회, 대한지질학회, 한국암반공학회, 한국원자력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안전관리를 위한 유관학회 공동 심포지엄’에서 ‘원자력과 지역의 상생발전을 위한 대화’를 이란 주제로 열린 특별세션에 패널리스트로 참석한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가 고준위방사성폐기물 정책에 필요한 국민수용성에 대해 발표한 고견을 지면에 담았다. <편집자 주>

고준위방폐물관리계획 확정 그 후
정부는 2016년 7월, 원자력진흥위원회를 열고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 기본계획’을 확정지었다. 이후 11월, 정부는 이 기본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지선정절차 및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법률’을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국회에 제출했다.

표면상으로 보면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활동 이후 정부가 추진해 온 일련의 계획이 착착 추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기본계획 확정을 둘러싸고 지역별 갈등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국회에 제출된 법안도 말그래도 언제 처리될지 모르는 ‘표류’ 상태이다.

일부 언론은 핵발전소 내 임시저장고가 곧 ‘포화’된다며 시급성을 강조하는 기사를 연일 쏟아 내고 있으나, 제대로 된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하는 ‘앞뒤가 꽉 막힌 상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준위방사성폐기물(사용후핵연료) 관리 방안에 대한 논의는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니다.

부안 방폐장 문제 이후 ‘사회적 공론화’란 단어가 우리 사회에 나타난 것이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이후 비슷한 이들이 비슷한 제목의 토론회와 용역만 반복하고 있을 뿐, 문제 해결을 위한 진도는 전혀 나가지 못하고 있다.

공론화위원회가 공론화의 발목을 잡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작년 기본계획과 법안을 둘러싼 논쟁만을 놓고 본다면, 문제는 2013년 출범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에서 시작된다. 2007년 국가에너지위원회 사용후핵연료 T/F의 권고가 만들어지고 나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공론화’는 이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 활동은 위원회의 위상, 논의 범위, 위원 구성에서 큰 견해차를 보였고, 환경단체 탈퇴 이후엔 위원회 내부의 민주주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누가봐도 반쪽짜리’ 위원회로 권고보고서를 발표하는 암담함을 연출했다. 특히 공론화위원회 권고안이 갖고 있었던 각종 개념의 혼란과 불통 문제는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눈앞의 쟁점을 놓아두고 40년 뒤의 계획을 잡다
하지만 기회는 있었다. 2015년 공론화위원회가 활동을 마치고 난 이후 정부는 이 ‘권고안’을 재검토했다. 법적 강제력이 없는 ‘권고안’이었기에 이후 기간은 공론화위원회가 갖고 있었던 한계를 보완하고 공론화위원회가 논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린 다양한 개념과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2015~2016년 기간 동안 정부는 내부 논의만 진행했을 뿐, 이러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특히 당장 시급하게 닥쳐온 기존 핵발전소 내 임시저장고 증설 문제를 공론화 작업을 추진하지 않은 채, 수십 년 뒤에 벌어질 최종처분장에 대한 입장을 중심으로 기본계획과 법안을 만듦에 따라, 스스로 ‘먼 미래의 일과 지금 당장의 문제를 얽어버리는 덫’에 빠져버렸다.

이미 수차례 강조했지만, 현재 고준위방폐물을 둘러싼 쟁점은 결코 부지선정기간 12년이 적절 한가 20년이 적절한가, 3단계 절차가 좋은가 4단계가 좋은가, 동굴처분이 좋은가 심층처분이 좋은가 따위에 있지 않다.

당장 눈앞에 닥쳐온 경주와 영광의 임시저장시설(건식시설)을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쟁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쟁점과 논쟁을 회피한 채, 몇 가지 기술적 쟁점이나 수십 년 뒤의 계획만을 늘어놓는다면, 이는 아직도 문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 복잡하게 꼬아 놓을 뿐이다.

또 다른 쟁점, 유성 원자력연구원 사용후핵연료 반출 문제
그리고 최근 대전 유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은 10여 년 동안 사용후핵연료 문제를 다뤄왔던 이들의 논의 범위가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전 유성의 한전원자력연료 제3공장 증설 반대를 시작으로 모인 대전 유성지역 탈핵운동의 흐름은 최근 파이로프로세싱 반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고 있다.

기존 핵발전소에서 대전으로 옮겨진 사용후핵연료의 문제는 그간 공론화 과정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파손된 핵연료의 이송, 육상운송을 둘러싼 미흡한 법적 규제, 운반용기와 추가적인 안전성 우려, 실제 핵연료를 이용한 파이로프로세싱 실험 실시 등... 그동안 검토되지 못했던 이슈들이 대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 사용후핵연료 반출을 둘러싼 문제제기는 단지 대전과 부산, 영광, 울진의 문제가 아니다. 육상운송이 불가피한 상황을 고려할 때, 사용후핵연료 반출의 안전성과 적절성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으면 대한민국의 절반 ‘대전이남’이 거의 모두 이해당사자로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의 사례에서 목격한 것처럼 사용후핵연료의 이송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많은 지역에서의 반발과 논쟁,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으며, 특히 현재처럼 법제도와 도로와 운반용기 등 운송설비 미흡한 상황의 불신과 갈등은 향후 고준위방폐물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쟁점이 될 것이다.

모두가 탈핵을 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선거, 고준위방폐물 문제는?
그리고 조기 대선이 예상되고 있는 지금, 모든 대선주자는 나름대로의 ‘탈핵’을 주장하고 있다. 2012년 대선에서 ‘탈핵’을 주장한 민주당과 정의당은 물론이고, 국민의 당과 바른정당 등 새누리당을 제외한 모든 원내 정당이 ‘핵발전소 건설 제한’ 등을 당의 강령/정책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유력 대선주자들도 마찬가지여서 문재인, 이재명 등 민주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유승민 의원 등도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이후 추가 핵발전소 건설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본격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아직 고준위 방폐물 문제를 둘러싼 대선 후보들의 입장은 명확히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신규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된다면, 고준위 방폐물 문제는 이전 정권보다 더 풍부하게 논의될 가능성이 크다.

그간 고준위 방폐물 갈등의 또 한축에는 계속된 핵발전소 증설에 따른 불신과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차기 정부 임기 2017~2022년은 고준위방폐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이다. 매번 지지부진한 갈등과 논쟁만 오고간 고준위방폐물 문제를 이번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 후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이 지역상생인지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공론화의 시작이다
그럼 무엇이 바뀌어야 하나? 잘못 끼워진 단추를 제대로 채우기 위해서는 일단 꼬인 단추부터 풀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계획을 놓고 볼 때, 그 시작은 공론화 과정을 제대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 공론화위원회 활동에 대한 평가와 극복 과제를 선정하는 것이 첫 시작이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토론의 주제이기도 한 ‘지역상생’은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 방폐장 유치과정에서 지원된 ‘3000억원+알파’가 ‘지역 상생’을 위해 제대로 기여했는가? ‘지역 상생’이 금전적 지원으로만 구성되던 때는 끝났다.

금전적 지원은 그 정책이 그만큼 투명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하며, 떳떳하게 정책 추진을 못 하는 것에 대한 ‘보상’ 개념일 수밖에 없다.

유럽의 예처럼 정말 투명하고 안전을 신뢰할 수 있다면, 오히려 금전적 지원은 필요 없을 수 있다. 금전적 지원은 그런 요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을 때, 마지막에 제시되는 카드가 되어야하며, 그런 면에서 처음부터 이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또다시 공론화 논의를 복잡하게 꼬아버리게 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향후 진행될 고준위방폐물 공론화는 우리사회의 골칫거리인 ‘고준위방폐물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본적인 자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준위 방폐물의 향후 발생량, 처분 필요성, 재처리 여부 등 핵에너지 정책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간 고통을 겪은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 미래세대에 대한 고려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또 이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기술적 검토, 신기술에 대한 연구개발 등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런 논의 순서와 흐름의 맥락이 없이 각자 서로의 이야기를 뒤죽박죽 섞어 놓는다면, 차기 정부의 고준위방폐물 논의도 또 다시 ‘잃어버린 5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저작권자 © 한국원자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