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 교수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문재인 정부의 원자력 에너지 정책에 대한 시민적 관심이 높은 가운데 정책방향을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최근 정부는 신고리 5ㆍ6호기를 일시 중단하고 ‘공론조사’를 통해서 정책방향을 정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정부가 밀어붙이기식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기보다 전문가의 지식과 시민의 의견을 기초로 합의적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방침이기에 반갑게 생각한다.

갈등적 사안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민투표’를 결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국민투표는 결의성의 수준이 높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수준도 어마어마하기에 어떤 정부도 함부로 추진하기 어렵다. 원자력 에너지 정책과 같이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활용해서 정책결정을 내려야 할 복잡한 사안이라면, 애초에 국민투표를 거론하기조차 어렵다. 사안 자체가 국민투표에 적합한지 먼저 검토해야 한다.

공론조사는 갈등적 사안에 대한 시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론이다. 숙의민주주의 이론과 과학적 방법론을 결합해서 국민투표를 시뮬레이션 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 전문가들은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서 대안과 근거를 제시하고, ‘모집단을 대표하는 시민들’은 전문가들이 제시한 대안과 근거를 접하고 토론해서 의견을 형성한다. 공론조사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 형성한 여론을 측정하기에, 그 결과를 ‘충분한 정보와 합리적 토론에 근거한 여론’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서 갈등적 사안에 대한 정책적 결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공론조사 방법론은 1970년대 미국과 독일 등에서 개발해서 1990년대까지 활발하게 사용했던 ‘시민배심원 제도’의 경험, 1980년대 덴마크에서 개발해서 사용되고 있는 ‘합의구성 회의(consensus conference)’ 방법론 등에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1990년대부터 사회철학과 사회과학계에서 활발하게 검토한 ‘숙의민주주의 이론’에 대한 논의 성과를 배경으로 한다.

공론조사가 과거의 합의도출 방법론과 다른 결정적인 점은 ‘모집단의 의견분포를 추론하기 위해 과학적 여론조사 방법론’과 ‘시민적 숙의를 통한 의견형성 모형’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공론조사 방법론을 개발해서 전세계에서 정책결정에 도움을 주고 있는 스탠퍼드 대학의 피시킨 교수 연구진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전조사는 의사결정의 모집단의 의견 분포를 파악한다. 확률적 표집방법을 적용한 대규모 표본조사를 통해서, 합리적 토론과 숙의를 거치기 전에 여론이 어떠한지 미리 확인한다. 이 기초조사의 방법론적 충실도를 유지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최초 조사에 참여한 응답자의 일부를 ‘확률적으로 표집해서’ 숙의과정에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짧게는 당일 토론에 그치기도 하지만, 길게는 며칠 간 함께 숙박을 하면서 해당 사안에 대한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자를 선정한다. 참여자에 대한 숙박, 여행, 일당을 지불해야 하기에 참여자의 규모에 따라 비용이 증가한다.
◆참여자들은 해당 사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 또는 정책대안을 미리 준비한 전문가 세미나와 10~20명 정도 분반토론에 참여한다. 토론 참여자는 전문가에게 질문과 응답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정보제공 전문가의 섭외와 토론 진행자의 훈련 등이 토론회의 성패를 결정하기에 준비와 진행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의견조사를 수행해서, 해당 사안에 대해 얼마나 학습했는지, 의견의 변화가 있었는지, 의견의 배경이 되는 신념의 우선순위에 변화가 있었는지 등 자료분석을 수행한다.

지난 30년 간 미국, 영국, 호주, 중국, 일본 등 전세계의 정책 당국은 공론조사 방법론을 이용해서 세금인상, 사형제 폐지, 군왕제 유지, 정부지출 우선순위, 원자력 에너지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한 정책적 방침을 결정하는 데 활용됐다. 이런 사례를 놓고, 일부 이론적인 과제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방법론적 비판과 응답이 교차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공론조사 방법론에 대해 결정적 하자를 주장하는 이는 없다.

공론조사의 국제적 성공에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에서 이 방법론을 적용했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이 시사적이다. 정부는 2003년 사패산 터널 공사와 2007년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 갈등 사안을 놓고 공론조사를 추진하다가 포기한 선례가 있다. 2005년에 8ㆍ31 부동산 정책을 놓고 최초로 약식 공론조사를 수행한 바 있지만 방법론에 대한 논란을 빚었다. 2015년 사용후핵연료 관리방안에 대한 공론조사를 수행한 결과의 일부 공개여부에 대해 의혹이 일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례를 검토해 보면, 문제는 공론조사의 도입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당국의 투명성, 전문성, 설명책임 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외 사례를 검토해서 다음 두 가지 함의를 도출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당국의 공론조사 진행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스탠퍼드 대학의 피쉬킨 교수가 제시한 공론조사 방법론이 거의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지만, 그의 연구진이 전세계에서 공론조사 용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방법론적 엄밀성도 중요하지만, 조사 진행의 공정성이 매우 중요한데, 해당 국가의 시민들이 정책 당국의 공정성과 투명성, 그리고 설명책임 수행을 믿지 못한다면 공론조사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2012년 일본 당국은 원자력 에너지 정책대안에 대한 공론조사를 준비하면서 ▲공론조사 전반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실행위원회 ▲토론자료를 준비하고 설문대안을 만들 때 도움을 준 전문가위원회 ▲스탠퍼드 대학의 피쉬킨 교수를 포함한 감수위원회 ▲조사의 진행과 분석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3자검증위원회 등 4개 위원을 구성했다.

그러나 공론조사는 비용이 많이 든다. 각급 위원회를 설치하고,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해서 조사하고, 토론진행을 위한 전문 인력을 수급하는 데 일정한 품질수준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에 소요되는 비용이 상당하다. 하지만 이는 (사안의 적합성 문제로 인한 비용요인은 차치하고도) 국민투표를 결행하는 것에 비해 쌀 뿐만 아니라, 시민적 합의기반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정책을 추진했을 때 초래하는 사회적 갈등비용을 생각하면 저렴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본 기고는 2017년 7월 7일 정책브리핑(www.korea.kr) 정책기고에 게재된 내용을 발췌했음>

저작권자 © 한국원자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