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승 대덕 원자력포럼 전(前) 회장

김덕승 대덕 원자력포럼 전(前) 회장

1957년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정부 행정부서인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생기면서 우리나라는 ‘원자력’이란 새로운 에너지 문명에 눈을 뜨는 역사적인 계기가 됐다.

그 후 문교부 원자력과는 ‘원자력원’ 설립을 하기 위해 그 해 10월 ‘원자력법’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원자력법은 1958년 2월 마침내 국회에서 통과돼 1959년 1월 21일 김법린 초대 원장을 임명으로 정식으로 개원됐다.

원자력원은 이 당시 전반적인 정책을 다루는 원자력위원회와 사무총국, 그리고 연구기관인 원자력연구소 등 3개 부서로 구성돼, 우리나라의 원자력 행정업무와 함께 연구개발의 주역으로 큰 역할을 해왔다.

이번 호에는 1959년 원자력원 설립과 동시에 기술직 공채 1기로 그해 3월 1일 입사한 후 1996년까지 36년 동안 원자력계에 종사한 김덕승 대덕 원자력포럼 전 회장을 만나, 원자력원 설립 배경과 초창기 당시의 어려움, 그리고 원자력 산업계의 미래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

▲ 김덕승 대덕 원자력포럼 전(前) 회장
1959년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출발한 원자력원은 무엇보다도 원자력 관련 행정업무와 기술업무에 관한 기초를 다지는데 전 직원들이 힘을 쏟았다고 밝혔다. 그 때는 일본이 방사선 안전관리 이용 진흥분야 뿐만 아니라 방사선 동위원소 안전관리분야에서도 우리나라 보다 한 걸음 앞서서 우리들이 참고(參考)를 많이 하고 참작도 했지.

특히 우리나라는 원자력 행정을 시작하면서 외국의 자료 가운데 미국의 DOC(A) 자료를 많이 참고했으며, 미국과 일본 등 국제원자력기구의 도움을 받았지. 우리로서는 원자력에 관한 행정, 기술개발 등의 선례도 없고 새로운 것을 연구 개발할 기반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초창기에는 무엇이 위험한지 안전한지도 몰라 외국 전문가 파견을 요청했지. 이들 외국전문가들에게 우리가 작성한 리포트를 검토 받아 원자력 행정과 기술개발에 나섰지.

한마디로 미국, 프랑스 등 외국들과 행정, 기술개발 등 모든 업무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느꼈어. 그때는 6.25사변으로 전국토가 황폐하고 전 국민이 먹는 것과 입는 것, 사는 것이 지극히 어렵던 시기인 1959년도에 이승만 대통령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한 정부재정과 예산 지원을 하면서 까지 ‘원자력원’을 발족한 것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지.

이 당시 원자력원 원장은 장관급으로서 초대원장에 자유당 원내총무와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씨를 임명한 것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원자력을 시작하면서 멀리 내다보고 큰 포부 거창하게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거물급인 김법린 초대원장이 임명된 원자력원은 △ 원자력위원회 △사무총국 △ 원자력연구소 등 3개부서로 나눠져 각각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은 국무위원급으로, 원자력위원은 1급 공무원으로 임명했지. 초대위원에는 박동길 서울대 교수(지질조사 소장), 이종일 상공부 전기국장(서울대 공대교수), 김동일 서울대 교수 등 세 명이 임명된 것을 보면, 원자력원의 정부 행정 부서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무총국은 이사관이 총국장으로 앉고 기감 1명, 서기관 1명, 기정 2명 등이 총무과, 기획조사과, 관리과로 갈라져 각각 업무를 관장했지. 이민하 기획조사과 과장이 당시 많은 일을 추진해 우리나라 원자력사업 기본계획을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원자력연구소 쪽은 1급 공무원인 박철재 소장 휘하에 총 47명의 연구원과 직원으로 구성돼 연구개발에 주력했지. 하지만 1959년 조직이 완료된 원자력원은 초기에 4.19와 5.16을 거치면서 행정직과 연구진 사이의 내홍등 심한 격변기를 겪었다고 회고한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이 국비 1달러도 직접 결제하는 힘든 시기인 59년, 60년부터 이미 원자력 유학생을 일 년에 40여명 이상 보낸 것이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 6대 원자력강국으로 우뚝 서는데 커다란 주춧돌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이 국비와 병역면제를 해 주면서까지 원자력 유학생을 보낸 것은 그 당시 기술자와 과학자가 한명도 없던 우리나라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무엇보다도 78년 고리 1호기 발전에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먼 앞을 내다보고 큰일을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은 원자력 아버지라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발전으로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며, 선진 의료국가도 우리나라의 의료기술을 부러워하는 것은 일찍이 우리나라가 방사성 동위원소 기술개발에 적극 나섰기 때문이라며 온 국민들이 원자력의 좋은 면을 잘 모르고 있는것 같다고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60년대 초창기에는 원자력 계몽지도와 대학교 교수를 대상으로 원자력 이용에 대한 강습회 학술회의를 수시로 개최했다고 한다. 돈이 많이 드는 발전소 분야 보다는 비용이 적게 들고 손쉬운 방사성 동위원소 활용분야에 많은 계몽활동에 나섰다고 한다. 병원 의학 의료분야 진단치료분야에 대한 강습과 외국 원조자금으로 구입한 방사성 동위원소 진료세트를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부산대 의과대학에 설치하고 장비요원의 강습에도 많은 직원들이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학분야의 품종개량과 돌연변이를 통한 유용한 녹색혁명에는 그다지 기대하는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해 아쉽다며 후배들이 더욱 분발해 줄 것을 주문했다.

이민하 기획조사과 과장, 친구 고창순 교수, 고인이 된 이문호 교수 들과 함께 우리나라 원자력사업장기계획안과 방사성 동위원소 계몽활동을 할 때가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원자력사업장기계획안은 지나고 생각하면 신통하게 어긋난 게 하나도 없이 맞아 떨어졌어요. 특히 고리 1호기 원자력발전 건설 타당성 보고서는 예산이 1원도 없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죠. 각 대학과 에너지 관련 기관 직원들이 참여한 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이 당시 일한 사람들은 두꺼운 보고서와 업무 보고서를 만드는데 헌신적인 봉사정신과 사명감을 갖고 일에 대한 성취욕으로 한마디 군소리 없이 해 맡은 일을 완벽히 해냈다며 후배들도 선배 정신을 이어가 달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선배들의 희생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선진국들과 어깨를 당당히 겨루는 원자력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며 후배들의 선전을 외쳤다.

현재로서는 원자력이 유일한 에너지 대체수단이라고 재차 강조하며, 후배들이 원자력분야에 더욱 많이 진출해 줄 것을 주문했다.

특히 원자력산업은 앞으로 50년 이상은 밝은 미래와 청사진이 보인다며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후배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거듭 강조했다.

국내는 경·중수로 단계에서 핵비확산성 제4세대 원자로 단계로 그리고 나아가 핵융합 단계로 원자력분야가 확대되고 각 연관산업분야에서도 인력수요가 꾸준히 늘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조만간 원자력 해외수출국으로 물꼬를 틀 경우 안정적인 일거리와 취업이 보장된다며 후배들이 자부심을 같고 더욱 정진해 달라고 말했다.

-약력-

59년 3월 ~ 72년 9월 원자력원 조사진흥과장 원자력발전과장 조성과장
72년 9월 ~ 74년 5월  국립과학관 연구부장
74년 5월 ~ 81년 1월 한국과학원 행정실장
82년 2월 한국과학기술원 기획실장
81년 2월 ~ 88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 기획부장
89년 1월 ~ 91년 8월 한국원자력연구소 기술지원부장
91년 9월 ~ 92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전사업단장
93년 1월 ~ 96년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 자문위원
69년 ~ 89년 한국원자력학회 이사
82년 ~ 85년 한국전력기술 이사
85년 ~ 88년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이사
95년 9월 ~ 97년 8월 한국원자력학회 감사
98년 ~ 08년 대덕원자력포럼 회장

상훈
1972년 7월 근정훈정훈장
1992년 4월 국민훈장 목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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