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중립으로부터의 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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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중립으로부터의 탈피
  • 한국원자력신문
  • 승인 2020.06.22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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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 사에(越智 小枝) 도쿄 지케이의과대학 임상검사의학강좌 강사

일본원자력문화진흥재단(JAERO, Japan Atomic Energy Relations Organization)이 설립(1969년) 50주년을 맞아 원전 소재 지역에 거주하는 지역민, 저널리스트, 연구요원 등 각계 전문가로부터 ‘원자력’을 주제로 한 기고를 받아 재단 웹사이트(www.jaero.or.jp)에 게재했다. 지난해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게재된 7편의 기고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9주기를 맞은 그들의 ‘원자력’에 대한 인식을 가늠할 수 있었으며, 원자력이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발전하기 위한 제언들도 여과없이 담겨져 있다. 이에 본지는 한국원자력산업회의에서 발간하는 『원자력산업』2월호 <특별기고 모음>에 국문으로 번역된 7편의 일본원자력문화재단(JAERO)의 기고문을 연재로 게재하고 있다. <편집자 주>

오치 사에(越智 小枝) 도쿄 지케이의과대학 임상검사의학강좌 강사
오치 사에(越智 小枝) 도쿄 지케이의과대학 임상검사의학강좌 강사

“우리는 중립적인 입장으로 왔다.” “주관과는 관계없는 의견을 듣고 싶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현지를 방문하는 분들이 참 많이 했던 말이다. ‘공평하게, 공정하게’. 마음으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당시 소마 시(相馬市)에 살고 있었던 나는 ‘그런 말들이 주민들에게는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했던 건 에너지라는 간판을 등에 지고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중립적으로 주관을 배제한’ 대화를 제안하더라도 주민들은 신뢰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본래 중립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고, 대세에 치우친 시각을 가지는 것 또한 중립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시각을 ‘중립적인 입장’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현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주관과 관계 없다고 말하면서 주민들의 입장을 배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의 이해를 얻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업계에서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자신을 지워버리려고 하지만 도리어 자신이 객체화가 되지 않았다는 걸 보게 되었다고 한다.

에너지의 세계에서 대외적인 중립은 중요한 직업문화라고 생각한다. 과학자가 편향된 이데올로기에 휘둘려버렸기 때문에 과학이 전쟁에 이용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전쟁 이후의 반성에서 등장한 직업문화를 나자신도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한 발짝 밖으로 나서면, 사회에서는 각각의 치우친 감정과 사상이 만연하고 있다. 중립을 지키는 감정과 사상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에너지 관계자의 노력이 오히려 외부의 편견에 대해 무관심한 문화를 조성해버린 것은 아닐까?

“가해자인 기업과 피해자인 주민에 대해 중립적인 제3자의 입장에 서겠다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입장을 거들게 되는 것은 왜일까? 내가 과학 비판을 주장하는 주요한 이유는 과학주의가 과학을 그 주체로부터 분리하여, 과학의 성과가 오히려 인간에게 적대하며 그 자체의 생존 방식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 또한 위협이 된다는 역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후지타 신고(藤田慎吾), 왜 과학비판인가? (なぜ科学批判なのか,1984년 )

30년 전의 책에서 찾아낸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 해당한다. 복잡해진 지금의 사회에서 ‘전쟁 반대’와 같은 절대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평화를 위한 모종의 활동이 사고, 화재, 환경 파괴, 나아가 빈곤과 사회 격차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한다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선악(善惡)’이라는 주관이 전부다. 만약 중립에 집착한다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 것이고,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도 반성도 없을 것이기에 이는 도리어 무익하다기보 다도 해로운 결과를 남길 것이다.

‘과학의 주체’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가해성을 인지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좇아 그 가운데 가능한 한 인류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도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종사하는 의학 분야에서 ‘과학의 주체’인 의료인은 독이 될 수 있는 약을 활용하고 인체에 칼을 대어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때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의료인이 아닌 환자이다. 언제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의료인이 만인에게 ‘절대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많은 의료인이 자각하고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에너지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무기가 될 수 있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평화를 달성하는 모순을 선택하는 순간부터 에너지를 다루는 주체는 언제나 가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위험을 짊어지는 주체는 업계가 아니라 주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에너지가 모두에게 유익해질 수는 있지만 모두에게 ‘선’인 세계는 오지 않는다.

이러한 가해성은 원자력에 국한되지 않는다. 후쿠시마현 오다카시의 주민은 올해 죠반 해역의 흉어를 ‘자연으로부터의 보복’이라고 한탄하고 있다. 제염과 암벽 증축을 위하여 산을 깎아내고 나무를 베어내어 산과 강으로부터의 은총이 바다에 닿지 않는다. 대규모의 태양광 발전 부지에는 많은 양의 제초제를 뿌린다. 이는 당연히 예상된 결과이다.

원자력 발전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쪽에서 보더라도 제염과 재생에너지는 ‘절대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 관계자들은 예외 없이 이러한 폐해의 관계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원자력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얻을 수 없다는 걱정을 자주 듣는다. 많은 경우 이러한 이해 부족이 국민의 이해·활용 능력(リテラシー, literacy), 감정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자기 객관적 시각이 압도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사고 이후, 주민의 걱정, 고통과 재해 지역의 현상에 대해 상세한 보고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보였다’거나 ‘우리의 행동이 주민에게 이러한 영향을 미쳤다’는 자성적인 기록은 아직 부족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화, 다양화를 거듭하는 사회에서 에너지 관계자만이 편향되는 것을 면제받을 뿐 중립적인 입장에 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립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가지 않고 사실과 마주하는 것이 지금의 에너지 분야에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