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1세대 이창건 박사(대한전기협회 전력산업기술기준처 정책위원장)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중학교 4학년을 다니던 중 1947년도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가족과 함께 월남한 한 소년이 있다.
그 후 민족의 참변인 6.25사변 피난길에 미군부대서 흘러나온 ‘Atomic Bomb’라는 책을 우연히 손에 잡은 이 소년은 숨 막히는 핵폭탄 터트리는 과정에 밤이 새는 줄 모르고 심취한 나머지 뜬 눈으로 새벽과 싸우면 책속에 빠져들었다.
마치 손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연신 모래를 움켜지면 핵폭탄 실험장에 참가한 과학자들처럼 밤새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핵폭탄은 무엇인가’라는 스스로의 자문에 더 이상 잠들지 못한 소년. 
이 소년이 서울대 재학 중 미국 아르곤 국제원자력학교 제8기로 입학한 후 우리나라 원자력계 최초로 미국서 TRIGA 원자로 운전면허증을 취득한 이창건 박사(대한전기협회 전력산업기술기준처 정책위원장)다.
이번 호에는 윤세원 박사에 이어 우리나라 원자력계에서는 국제 원자로 운전훈련을 처음으로 이수한 이창건 박사를 서울 강남 논현동 한 중식당에서 만나, 그 당시 원자력 역사에서 밝힐 수 없었던 생생한 비화를 들어봤다.
본지가 인터뷰한 내용 중에는 이창건 박사가 미리 준비한 자료도 발췌해 실었다.

서울대 전기공학과 출신으로 공군 소령이던 현경호 선배를 1955년 만났다. 어릴 적부터 핵폭탄에 관심이 많던 나에게 현경호 선배는 공부하고 싶으면 매주 토요일 문교부 별관으로 오라고 했다. 창고와 같던 문교부 별관으로 가보니 좌장인 윤세원 선생과 공군에서 나온 리더인 김종병 대위가 이끄는 10명의 선배들이 ‘Introduction to Nuclear Engineering(핵공학입문)'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모임은 ‘Study Group’으로 불러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우어 총 사령관 요청으로 서유럽 전력계통을 성공적으로 복구한 시슬러씨를 만났는데 시슬러가 “작은 나무상자 속에서 ‘에너지 박스’속에는 우라늄이 있다”고 보여주며 이것만 있으면 석탄 화차 100량과 맞먹는 에너지를 낼 수 있다고 조언했다. 자원이 없던 우리나라로서는 우라늄이 100년을 준비하는 에너지원이라는 것은 간파한 이 박사가 ‘우라늄은 머리에서 캐내는 지식 에너지’라고 말하고 ‘우라늄을 캐내는 광부를 양성 하시요’라고 지시를 내렸지. 이승만 박사는 지식에너지를 캐내는 광부를 양성하기 위해 보사부, 건설부의 예산을 갖다 써 다른 부서에서는 불만이 많았지.
이 박사는 시슬러에게 물어봤데. 지금 광부를 양성하면 언제쯤 혜택을 보느냐고. 그러니까 시슬러가 20년 후에 큰 열매를 맺을 거라고 답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곧바로 교과부에 원자력 훈련원을 해외에 보내라고 지시 하거야. 이승만 대통령의 선견지명을 한 눈에 알 수 있지.
이때 4년 전부터 공부하던 Study Group 멤버들이 문교부의 해외파견 선발시험에 대거 합격했어. 나는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님과 생활대책 때문에 차일피일 2년 동안 미루다가 미국 국제원자력학교인 아르곤에 8기로 입학했지. 국제원자력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국내서 활동하던 Study Group 경험이 큰 도움이 됐지. 다시 말해 예습을 철저히 하고 입학한 학생인 셈이야.
마침내 교육이 끝나고 한국 훈련생들은 귀국길에 나서 San Francisco에서 일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곳 한국 총영사관에서 출두하라는 연락이 급히 왔어. 한국이 GA(General Atomic)사에서 100kW의 트리가 마크 (TRIGA Mark) - ∏ 연구로를 도입하기로 했으니 GA에 가서 기초교육은 물론 원자로 운전실습까지 받으라고. 그런데 체류경비는 각자 자기들이 스스로 부담하라는 훈령이 내려왔어. 그래서 우리는 남겨둔 비자금으로 값싼 싸구려 여인숙 같은 데서 자취하며 지냈지. 아름다운 꽃밭처럼 잘 지어진 GA사에서 2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후, 미국원자력위원회(US AEC) 최종 시험에 합격해 우리나라 최초로 트리가(TRIGA) 원자로의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영광을 안고 귀국했지. (TRIGA란-Training, Research and lsotope Production 전용원자로를 General Atomic사가 설계 제작했다).
트리가 마트(TRIGA Mark)-∏ 구입 당시는 참으로 많은 일화가 있어. 애국심이 넘친 우리들은 마침 스파이 작전을 펼쳤어. 계약상 원자로 설치는 GA사가 맡았고 주변시설의 건설 공사는 Holmes & Narver사가 맡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팔짱만 끼고 쳐다만 보다가 완공한 다음 인수만 받으면 됐지.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설치과정과 노심장비의 설치작업에 스스로 참여했지. 왜냐하면 계약상 설계도면을 주지 않기로 명시돼 만약 한국서 고장이나 보수작업 때는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우리는 공급회사 직원들이 점심을 먹거나 저녁시간에 퇴근하러 간 사이에 도면을 복사하거나 몰래 사진 찍는 스파이 작전을 펼쳤지.
장지영 연구관은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에 주요부품과 장비의 치수는 물론 재질, 조립상태, 구조 등을 상세히 그려서 몰래 갖고 들어왔어. 이 같은 노력이 나중에 동위원소 생산장비가 고장 났을 때 장지영 연구관이 그려놓은 그림을 참고해 그것을 자체 제작해 막대한 외화유출을 막는데 큰 도움을 됐어.
원자로 준공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정부가 나를 미국에 판견해 3천여종에 달하는 부품 구매와 농축 우라늄 도입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려 3개월 동안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머물며 매일 수십종의 부품을 발주했어. 그 중에는 부품 값이 오르거나 모델이 바뀌고 특히 문 닫은 회사도 많아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지.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우라늄을 어떻게 한국으로 들여오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지. 미국의 원자력법에는 농축우라늄을 포함해 특수 핵물질은 해외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야.
우리로서는 농축우라늄을 사지 못하면 핵연료를 만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핵연료 없이는 원자로 가동이 불가능해 우리나라의 원자로 도입 사업 자체가 물거품 위기에 처해 질 수 있어 어떻게 하면 농축우라늄을 한국으로 가져 갈 까하는 생각에 잠이 안와 밤새 고민을 했어. 그렇다고 내가 미국 원자력법을 고칠 수는 없고 해서 미국원자력위원회(US AEC)를 수십 번 찾아가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묘안 찾기에 몰두했어. 그래서 꼼수를 찾아내지, ‘농축우라늄을 사지 않고 당분간 임대해 사용하되 그 기간 동안은 사용료를 지불하면 원자력법에 저촉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다’라는 묘안을 찾아낸 것이야. 마침내 농축우라늄을 한국으로 들여오는데 성공했지.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감격의 순간을 만끽했어. 귀국해 원자로운전에 전념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 연구부서에서 ‘중성자속(Flux)이 너무 낮아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불평이 쏟아져 원자로공학연구실 관계자들은 연구소 창립 10주년인 1969년 4월 노심출력을 2.5배(250kW) 증강했지. 그때 열 출력과 냉각문제 해결은 기계전공인 이관 실장이, 노심해석과 제어계통 개조는 내가 맡아 해결했어. 또 나는 해마다 도입하던 중성자원(Neutron Sourece)을 재생식으로 바꿔 원자로를 운전하면 중성자원이 스스로 충전되는(Regenerative)방식으로 설계 제작하는데 성공해 외화절약에도 많은 기여를 했어.
참 그리고 TRIGA Mark-Ⅲ 설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알리고 싶어. 나는 TRIGA Mark-Ⅱ 운전과 원자력발전사업에 몸이 묶어 TRIGA Mark-Ⅲ 개념설계와 상세설계, 핵계산, 열역학, 방사선 문제 등 모든 것은 김동훈 박사가 주도하고 오세기 박사가 뒤에서 도와졌지.
김 박사는 힘든 과제도 훌륭히 해내는 전자공학 전문가였고 행동과 결과만으로 답변하는 과묵한 사나이야. 그런 분이 내 친구였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지.
만일 TRIGA Mark-Ⅲ 설계를 내가 한 것으로 알려졌거나 기록돼 있다면 이번 인터뷰를 통해 꼭 정정됐으면 해, 사실(史實)은 소문으로서가 아니라 진실에 기초해 기록돼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개발한 원자력 관련 소중한 것들을 방치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연구개발해야 해. 예를 들면 해수담수화 원자로인 SMART가 그 중 하나지. 월성 1호기를 건설할 때 중수로의 Calandria를 밖에서 조립해 철로로 격납용기 안으로 끌고 들어가 설치한 예를 조선업계에서 본받아 이제는 한국의 조선업계가 Block(우리의 Module) 방법 채택으로 건조공기를 단축시키는 노 하우분야는 세계으뜸이잖아. 따라서 이제는 조선업계의 Block 생산 법을 벤치마킹해 원전 건설에도 재 접목 시킬 단계에 와 있어. 또 각 플랜트의 출력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점도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지난 7년간 친구와 함께 원자로의 해외수출을 위해 뛰어 다녔는데 우리 원자력계의 창구가 단일화 돼 있지 않아 실패로 돌아간 쓰라린 경험을 겪었지. 앞으로 우리나라는 프랑스 원자력계 처럼 원자력 수출창구를 단일화해 시너지 효과를 올릴 수 있는 범정부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싶어요.  

이창건 박사는-
고향이 평안북도 선천(宣川)인 이창건 박사는 중학교 4학년 재학 중 가족을 따라 47년도에 월남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이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원자력학회(ANS) 최고 영예인 펠로우(Fellow)에 선정된 이재승 박사에 이어 한국인 두 번째이자 한국 토박이로서는 최초로 ANS Fellow에 선정됐다.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자 곧바로 특수부대인 켈로부대에 입대해 소련군 장교들을 생포해 오는 각종 특수작전에도 참가한 이력을 갖고 있다. 이 박사는 강원도 화천지구에서 공을 세운 밸브르트 미 장군(정확한 이름 확인요망) 동상을 화천발전소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밸브르트 장군이 그 당시 에너지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한국의 켈로부대와 함께 화천지구 탈환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박사는 또 세계 국제 원자력 중심지인 비엔나가 IAEA자금을 받으러 갔을 때 북한요원들의 포섭 전화를 자주 받아 항상 잠잘 적에는 잭나이프와 비상용 로프를 침대에 놓고 자곤 했다는 비화도 전해줬다.
‘대한민국 원자력 1세대로서 정말 복 받은 은퇴자’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항상 갖고 있다는 이 박사는 우리나라의 원자력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원자력계 후배 및 관계자들이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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