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규 한국원자력안전아카데미 이사장

노란 국화꽃이 만발한 1956년 어느 가을.
덕수궁 미술관 뜰에는 육사생도와 수많은 군중들로 둘러 싸인 가운데 세계적인 과학자 아인슈타인 대형 초상화 아래서 당시로서는 너무 생소한 ‘원자력과 방사선’에 대해 유창히 해설하고 있는 대학을 갓 졸업한 앳된 청년이 있었다.
미국 정부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홍보하기 위해 세계 각국을 순회 개최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전시회’ 해설자로 우연히 뽑힌 이 청년은 이를 계기로 미국 아르곤 원자력학교와 미국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 보건 물리 과정을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보건 물리실을 만들어 방사선 방어 및 안전기술 분야를 처음 전파한 선구자가 됐다.
이번호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에 대한 국민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원자력아카데미 임용규 이사장을 만나 △ 우리나라의 방사선을 이용한 보건물리분야가 최초 도입된 배경 △ 2000년도 해체 철거 위기에 놓인 우리나라 원자력역사의 대표적 상징물인 ‘연구용원자로 트리가 마크 Ⅱ’가 영구 보존하게 된 비사에 대해 들어봤다.

▲ 조청원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왼쪽)과 임용규 원자력안전아카데미 이사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1956년 서울대 전기과를 갓 졸업한 청년 임용규는 우연히 문교부 기술교육국 원자력과에서 미국 정부가 해외각국을 돌며 개최하는 ‘원자력 평화적 이용전시회’ 해설자를 구한다는 모집 공고에 지원 합격했다.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각 지방을 순회 전시회는 100만 여명의 군중이 찾아와 감마방사선 조사법을 잘 이용하면 감자나 마늘의 종자도 개량할 수 있고, 씨 없는 수박도 재배할 수 있다는 그의 설명에 신기하듯이 쳐다보는 눈동자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회고했다.  
▲ 1956년 9월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전시회에 해설자로 선발된 임용규 이사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56년 9월 덕수궁에서 처음 개최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전시회’는 우리 국민들에겐 너무 생소하고 신기해 정말 군중이 구름같이 몰려와 구경했습니다. 이 당시 원자력은 옥수수를 크게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엄청난 사건으로서 관람객 수가 무려 100만 여명에 달했습니다.”
원자력은 신(新)학문에 목말라하던 임용규에게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돼 인생항로가 원자력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는 원자력전시회를 마치자 주저하지 않고 정부가 추진한 제6회 원자력 국비 유학생 시험에 합격해 1년 과정의 미국 아르곤 원자력학교로 유학을 갔다. 미 아르곤 원자력학교에서 1년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재학 중 X-RAY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방사선 보건물리 분야 공부를 위해 정부에 유학기간을 연장을 요청했다. 문교부 원자력 과장을 하던 윤세원 박사의 도움으로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1년 동안 방사선 안전관리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제가 방사선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보건물리분야서 대한민국에서 선구자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정부에 유학기간 연장을 요청해 미국 미시간 대학 보건물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59년도에 한국에 들어와 단군 이래 최초로 한국에 보건 물리실을 개설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원자력 안전 분야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학 분야의 방사선동위원소를 처음 만드는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었죠.”
▲ 1958년 미국 아르곤 국제원자력학교 졸업 장면
66년도 에 연속적인 가뭄이 심하였던 때에는 방사성을 이용해 지하수 탐사를 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3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지하수 개발에도 나섰다. 특히 방사선 물질을 이용해 저수지나 댐의 누수 위치를 알아내 우리나라 치수사업에도 크게 공헌했다.
무엇보다도 임용규 박사의 원자력산업계에서의 공로는 우리나라 과학계의 메카이자 첨성대라 할 수 있는 ‘연구용원자로 트리가 마크-Ⅱ’의 보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59년 7월 14일 서울 공릉동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지 안에 최첨단 과학기술결정체이며 원자력이용개발의 모체역할을 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원자로 트리가 마크-Ⅱ 기공식이 이승만 대통령의 시삽으로 이뤄졌다. 이 원자로에 1962년 3월 19일 16시 52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원자력’이라는 ‘제 3의 불’을 점화(핵반응 임계도달)시킨 것은 우리나라가 원자력시대 진입을 선언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원자로를 이용한 연구개발과 인력양성이 모체가 돼 오늘날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이 세계 6대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지금은 원자력기술을 수출해 막대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과학기술분야의 현 세대가 후세에 남길 역사적 유물 중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원자로야 말로 첫째가는 과학문화재라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1985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대덕으로 이전하면서 그 부지와 건물이 한전에 매각됐고 계약내용에 연구용원자로 1호기와 2호기에 대한 해체·철거를 원자력연구소가 이행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자력연구소는 원자로 해체 · 철거팀을 구성해 외부 용역회사와 계약해 우선 연구동 원자로 2호기의 철거작업을 진행시켰다. 원자력안전위원이던 임 박사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리나라 최초 연구용 원자로 보존에 관한 조사 연구’과제 책임자였던 임 박사는 원자력계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최초연구용 원자로 보존 추진위원회’를 2000년에 발족시켰다.
 원자력원로들도 함께 우리나라 최초 연구용원자로의 역사적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지하고 그 보존 · 기념관화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우리나라 최초 연구용원자로의 보존 · 기념관화를 위한 건의문 작성, 정부, 한전, 연구소 등 관련 기관장의 사무실 문턱이 닿도록 수시로 찾아가는 고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행히 임 박사와 원로들의 이 같은 노력으로 연구용원자로 2호기는 2005년 철거되었지만  비운을 겪었지만 ‘최초의 연구용원자로’는 철거 일보 직전인 2007년 11월 한전이 정부가 입증하는 보존협약서에 서명함으로서 보존키로 결정됐다.
마침내 7년 6개월 동안 계속된 보존에 대한 공방에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2007년 11월은 원자력계로서는 경사스런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연구로 원자로 2호기는 철거되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원자로는 후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됩니다.”
임 박사는 최초의 연구용원자로가 잘 보존되고 이를 기념화해 국민들의 원자력 교육과 계몽에 잘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희대학교 원자력공학과에 교육용 원자로를 들여 놓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74년 주미한국대사관 초대 과학관으로 일 할 때 미국에서 연구용원자로를 해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경희대 총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미국의 연구용원자로를 운임 비용만 대고  거의 무상으로 들여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당시 핵연료는 위험하다고 해 외국의 선박들이 운송을 안 해줘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개월 동안 묵혀두었다가 간신히 대한선박을 구해 운송에 성공했다고 당시의 어려움을 회고했다.    
56년 덕수궁서 원자력 전시회 해설가로서 원자력과 첫 인연을 맺은 20대 청년였던 임 박사의 원자력 인생이 반백년을 훌쩍 넘겼다.
젊은 청춘과 뜨거운 정열로 한 평생을 원자력에 받친 임용규 박사.
현재 ‘원자력 원로 포럼’과 초등학생들의 자연방사선 체험 등을 통해 원자력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임용규 이사장은…
보건물리기술 분야 최초 전파

1959년도에 미국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 보건물리 과정을 졸업한 임용규 이사장은 우리나라에 방사선 관련 보건 물리기술 분야를 최초로 전파한 장본인이다.
특히 1985년 원자력연구소의 대덕 이전으로 해체 · 철거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Ⅱ’의 영구 보존을 위해 약 7년 동안 직접 발로 뛰며 과학기술부, 원자력연구소, 한전 등 관계자들을 찾아다닌 끝에 대한민국 원자력 역사의 모태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Ⅱ’를 지켜낸 인물이다.
또한 1969년 3월 탄생한 우리나라 최고의 원자력분야의 학술단체라 할 수 있는 한국원자력학회를 태동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5월 21일 학회 창립 40주년행사에서 학회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학력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56년)
미국 아르곤 국제원자력학교 졸업(58년)
미국 Michigan 대학교 대학원 보건물리과정 졸업(59년)

경력
원자력청 원자력연구소 보건물리실 연구관(59년~72년)
주미 한국대사관 초대 과학관(73년~76년)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 진흥국장, 과학재단 사무총장(겸직)(76년~81년)
국립과학관장(80년~81년)
한국과학기술원 상임감사, 원자력공학과 겸임교수(85년~89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96년)
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99년~03년)

학술단체 및 유관기관 경력
한국방사성동위원소협회 회장(88년~91년)
한국전력공사 이사(91년~93년)
대한방사선방어학회 회장(91년~93년)
한국원자력학회 회장(93년~95년)
IAEA 원자력안전기준위원회 위원(96년~99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회장(93년~05년)

상훈
국민훈장 모란장(99년)
홍조근정훈장(79년)
면려포장(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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