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연구원 이민하 이사장

세계 6위의 원자력 강국 대한민국.
올해 원자력 반세기를 맞이한 우리나라는 미국, 캐나다, 프랑스, 일본, 러시아 등 선진외국과의 어깨를 당당히 겨루며 원전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명실상부한 세계 6위의 원자력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은 원자력인들의 뜨거운 열정과 애국심,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1957년 최초 문교부에 원자력과가 생긴 이래 우리나라가 원자력 불모지에서 ‘원자력 100년 대계’를 내다보는 현 시점까지 성장하게된 시발점으로 1961년에 만든 ‘원자력사업장기개발계획안’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그러면 국내 최초의 ‘원자력사업장기개발계획안’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이번 호에는 대한민국이 원자력강국으로 나아 갈 수 있도록 나침반 역할과 든든한 토대가 된 ‘원자력사업장기개발계획안’ 초안을 직접 작성한 이민하 원자력원 기획조사과장(당시 직책)을 만나 비화를 들어봤다.

 

▲ 1962년 IAEA총회 참석 장면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 수속까지 다 받아 놨지만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잠시 미국 유학을 미루고 있던 이민하(李敏廈)는 1957년 우연히 문교부 출입기자인 친구를 만나는데 그 친구로부터 문교부 원자력과에서 자네 같은 이공계출신 인재를 찾고 있다고 하면서 윤세원 교수(당시 우리나라 원자력과 초대 과장)과의 인터뷰를 주선했다.
윤세원 교수는 처음 본 이민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앞으로 우리나라 원자력계의 든든한 일꾼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곧바로 원자력과로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이민하가 원자력과와 첫 인연을 맺게 되는 순간이다.
문교부 원자력과에 첫 발을 들여 놓은 이민하의 첫 업무는 일본, 미국 등 해외 선진국의 최신 원자력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것이었다. 일어와 영어에 능통한 이민하는 일본뿐만 아니라 USAEC REPORT를 조사분석하여 스크랩한 후 윤세원 과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일본은 원자력분야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선 국가였기 때문에 산케이 신문과 과학계 정보 그리고 원자력연감 정보 등은 우리나라의 원자력 정책 수립과 나아갈 길을 제안하는데 큰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그당시 원자력과에는 이진택기좌(서울대 화학과 미국 아르곤 원자력연구소 출신)가 이끄는 기술계통직원 김기수(서울대 물리과) 이민하(서울공대 전기공학과) 정명조(부산수산대)가 있었고 행정계통직원으로는 정군양(주사) 김태환(서울법대)이 있어 윤세원 과장을 보필하였다.
그 후 1959년 1월 국무위원급 부서로서 대통령 직속으로 원자력원이 설립되면서 문교부 원자력과 직원들이 원자력원 사무총국으로 승계됐다.
초대 김범린 원장님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신 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망이 매우 두터운 인물로서 자유당의 원내총무까지 지내신 분이셨습니다. 원자력원 수장에 거물이 오신 것이지요.
원자력사무총국에는 총무과, 기획조사과, 관리과, 건설과 등 4개과가 있었고 나는 기획조사과에, 정명조씨는 관리과에, 정군양 씨와 김태환 씨는 총무과로 분산 발령 되었었다. 
사무총국장은 경성제대 출신이자 외자구매처 국장으로 있었던 김대만 씨가 발령되었고, 초대 기획조사과장은 연세대 물리과 교수를 하던 이철주 박사가 발령되었었는데 해박하고 의욕적인 분이셨지. 이 당시 기획조사과업무는 원내 기획은 했지만 솔직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원자력산업이 거의 없을 때라 중장기계획은 제대로 세울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께서 미국 측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라원자력협정을 맺고 원자력원을 설치하신 뜻을 깊이 새겨 나름대로 많은 조사와 분석을 하면서 우리나라 원자력의 미래를 그려 보았던 시절이었지요.

 

그 다음해 4.19 혁명이 나자마자 원자력원장으로 민주당출신 정치인 김양수씨가 발령되었어. 하지만 정치적으로 임명되신 분이라 원자력원이 잠시 슬리핑 상태에 빠진 시절이었지. 그러나 5.16혁명이 나니까 민주당 출신들은 자리를 내놓고 해병대에서 원자력원을 접수하면서 해군 의무감인 오원선 박사께서 원장으로 취임하셨고, 사무국은 경응호 사무총장이, 그리고 이동집 소령이 원자력연구소 감독관으로 나왔어. 당시 군사정부는 조국 근대화라는 사명감이 투철한 장교들을 발령해 행정업무의 근대화를 시작했다는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제일 먼저 한 것이 간부에게 선진 행정기법교육을 시켰다는 점을 높이 살 수 있어. 나는 5.16군사혁명 직후 기획조사과장으로 발령되었고, 그 후 고급공무원 행정 교육을 수차례 이수했고 국방대학원에서는 국가정책수립과정교육을 받은바 있지. 특히 국방대학원 교육은 원자력사업 장기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울 때 큰 도움이 되었고 진짜 교육을 잘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1961년 8월 초 경응호 사무총장이 나를 불러가지고 “원자력원이 정부의 중앙부서로서 원자력사업개발장기계획을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아직껏 계획안이 없다는 것은 기획조사과장이 책임져야 할 일이요 앞으로 일주일 이내로 계획안을 작성하여 원자력위원회에 상정토록하라고 다그치는 거야. 일주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지만 통하지 않아 결국 10일간의 기간으로 계획수립을 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였지. 그당시 나는 철야작업을 해서라도 국방대학원에서 국가정책수립과정을 실습한 바 있는 경험을 살리면 임무수행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한편 가졌었지.

▲ 원자력원의 원자력장기계획 발표회의 장면(가운데 오원선 원장)
하지만 국내 정치와 사회가 혼란하던 그 당시 ‘원자력사업장기계획’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을 이 과장은 회고했다.
이 당시 이 과장은 부서로 돌아와 같은 부서의 기획업무를 맡고 있는 이원구 연구사와 함께 10여일 동안 퇴근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철야작업 끝에 마침내 ‘원자력사업장기계획안’을 탄생시켰다며 그 당시의 어려움과 기쁨을 피력했다.
각고의 산고(産苦) 끝에 탄생한 ‘원자력사업장기계획안’은 당시 무수정으로 원자력위원회에 상정돼 의결됐다고 한다. 그 후에 이 과장은 원자력원 오 원장과 함께 송요찬 내각수반께 브리핑 드리는 영광을 가졌어. 그 자리에서 과묵한 송 수반께서는 ‘자신 있나’라고 짧게 하문하시었지. 그래서 “네 자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자리에서 결제를 해주셨어.
곧바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옥창호 위원실로 가 브리핑을 드리니 옥창호 위원께서 “이 과장 서대문 형무소 안 갈 자신 있소”라고 엄포를 놓으시면서 ‘원자력사업장기개발계획’이 잘 만들어졌다고 칭찬을 하신 일화도 있지.
그 길로 옥창호 위원과 오원선 원장 두 분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실로 들어가 보고를 마친 후 나온 오원장의 안색이 희색이 만면해 돌아온 것이야. 마침내 박정희의장 결재까지 맡아 국가원자력장기개발계획이 확정된 순간이야. 너무 기뻐서 어떻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야. 그리고 박정희 군사혁명정부가 원자력분야의 국가계획을 세워놨던 것은 높이 평가할 만 해.    
“10여명의 전문가 집단이 최소한 반년정도의 시일이 걸려 수립하여야 할 수 있는 작업을 2~3명의 젊고 열성적인 기획조사과 공무원에 의하여 입안돼 국가계획이 확정됐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찔한 일 이야”라고 이 이사장은 회고했다.
▲ 원자력원의 원자력장기계획 발표회의 장면
그 당시 원자력사업장기개발계획안을 만들던 생각을 소개할까. 먼저 이 장기계획에는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과 방사성동위원소 활용사업이 포함돼 있었지. 당시 미국의 분석에 의하면 원자력발전소는 1975년이 되어야 상업용 발전소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었지. 그래서 1975년을 가상 도입연도로 예측하고 플러스 마이너스 3년을 목표연도로 정했지. 당시 목표연도의 추산 총 발전용량을 370만kW로 보았을 때 1개 발전소는 그 나라의 그리드에 10%를 넘으면 안된다는 일반 룰로 보아 최대 50만kW으로 추산했어. 우리나라 최초의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1978년 가동했으니 거의 맞아 떨어진 게 아닌가 생각하면 뿌듯함을 느껴요. 그리고 방사성 동위원소분야는 방사선의학연구소와 농학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이지. 그 계획은 오 원장께서 의사출신이셔서 비교적 빨리 추진되었지. 지난 50년의 원자력 역사를 보고 있자면 중장기 계획의 필요성과 당위성 그리고 우리나라 원자력인들의 땀과 노고를 다시금 존경하게 되는 마음을 누를 수 없어요. 당시에는 앞서가고 있던 일본도 장기계획을 못 세웠지. 그런 맥락에서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이 뿌듯해. 우리 과에서 같이 철야작업을 하면서 장기계획을 세웠던 이원구씨를 잊을 수 없어.
이 최초의 장기계획서는 우리나라 원자력 사업의 모체가 돼 다음해인 1962년 경제기획원이 작성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장기원자력 발전소 도입계획’이 정식으로 포함됐다고 이 이사장은 말했다.
그 후 1966년 2월까지 원자력원에 근무하고 1966년에 KIST가 설립되면서 초대소장에 최형섭 박사가 발령되면서 나도 KIST로 옮겨가 새로운 과학연구기관을 만드는데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 무척 감회가 새로워.
지금은 과학문화연구원에서 후진양성에 여념이 없는 이 이사장은 “젊은 청춘을 바친 바 있는 원자력 인생이 자랑스럽다”며 “앞으로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의 해외 수출에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붓고 싶다”고 피력했다.
이제 세계 6위권이 원자력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원자력발전은 해외진출을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은 세계 각국이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심이 많아 앞으로 300여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원전 1기 건설에 약25억불이 드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가 이 가운데 1백기를 건설할 경우 3000억불 산업이 되지요. 지난 동안 반도체 조선업을 하여 먹고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원자력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이 이사장은 당부했다.
특히 이 이사장은 원자력회관 건립이 평생의 염원이라고 피력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나라 원자력역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원자력회관’이 빠른 시일 내에 건립됐으면 한다”며 “‘원자력회관 건립’을 위해 원자력인들이 다 함께 힘을 모으자”고 거듭 강조했다.
▲ 조청원 본지 편집위원(오른쪽)과 기념촬영하고 있는 이민하 이사장


이민하 이사장은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졸업
 하버드 대학교 AMP과정 이수
 원자력원 기획조사 과장
 KAIST 기획관리실장 및 이사
 동양고속(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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