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前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 강박광 박사 회고
5공화국 한국원자력연구소 위장 폐쇄와 기적적 회생 과정 비사(秘史)①
전두환 5공화국 지시로 이정오 과기처 장관 ‘일방적 명령 지시’

‘무궁화 꽃이 피어습니다.’
김진명 작사가 2003년 출간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소설책은 1970년대 우리나라와 미국이 핵폭탄 개발을 두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이 첨예한 신경전을 그린 화제의 소설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전두환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5공화국의 정권인정을 받기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몰래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핵폭탄 설계도를 미국정부에 받쳐다는 설도 있다.
이 당시 핵폭탄 개발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미국의 압력으로 폐쇄조치 단계 조치를 단행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원자력계의 뜻있는 일부 인사들은 우리나라 과학계의 100년대계를 위해 서슬이 시퍼렀던 제5공화국 정권에서도 한국원자력발전소의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위안을 사리지 않고 항거했다.
본지가 우리나라 원자력계의 지난 역사를 생생히 기록하기 위해 게재하고 있는 ‘대한민국 원자력 뿌리를 찾아서’ 시리즈에 이번 호에는 1974년부터 전(前) 과기처 원자력 안전심의관을 지낸 강박광(姜博光)박사가 그 당시부터 현장에서 보고 듣고 기록한 자료와 함께 주변 배경 등을 상세히 적은 ‘한국원자력연구소 위장 폐쇄와 기적적 회생 과정’에 대한 비사(秘史)를 실었다. <편집자 주>


제5공화국 출범 당시인 1980년부터 몇 년간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큰 시련으로 한 때 아사 상태에 빠졌으나 이를 현명히 극복하고 극적으로 회생하는 과정을 거쳐 1989년까지는 완전히 원상회복하는 수난기를 겪었다.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대덕으로 이전하여 핵연료개발공단을 흡수통합 함과 동시에 연구소의 명칭에서 원자력이란 표현을 말소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개칭함으로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폐쇄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위장폐쇄라는 극약처방 조치로 더 큰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시련을 초래한 배후의 내막과 큰 힘의 실체에 관해서는 그동안 30여 년간이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한 조치가 시작된 1980년도의 연구소 예산은 시설비와 인건비만 남기고 연구비가 거의 삭감되었기 때문에 개점휴업 상태였으며 특히 핵연료개발공단은 이러한 충격 때문에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적 조치는 원자력연구소가 폐쇄되는 크나큰 파국을 막고 명맥을 유지해 되살아나게 하기 위한 즉 기사회생을 위한 지혜로운 조치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졌다. 결국 천운이 따라 회생한 연구소는 원자력발전기술(nuclear power technology) 위주의 연구소라는 새로운 면모로 부활해 1989년 그 명칭까지 원상복구하게 된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납득할만한 해명이 없었으며 추측만 난무할 뿐이었다. 그 당시 나는 과기처의 원자력 담당 주무 국장이었는데도 배경 전모는 상세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그 당시 직접 경험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동안 오랜 세월 비밀로 간직한 사건들과 세월이 지나면서 추가로 알려진 사실들을 짜 맞추어 적어도 납득 가능한 스토리로 엮어 볼 수는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개하고자 한다.

 

◆원자력연구소가 핵의혹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적 배경
1973년의 석유파동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5기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완료 또는 추진 중인 시기에 발생했기 때문에 화석연료 의존 감소 차원에서 핵연료 국산화 사업에 대한 강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원자력 에너지가 화석에너지 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 되었고 한반도 주변의 국제적 안보상황도 불안한 정세였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업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최근 발간된 한국원자력연구소 40년사에 기술된 바에 근거해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정부의 허가를 얻어 1971년부터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업인 사용후 핵연료재처리사업에 착수했는데 이는 일차로 사용을 완료한 핵연료(우라늄)에서 또다시 사용 가능한 새로운 핵물질(플루토늄)을 추출하는 사업인데 그 것은 핵폭탄에도 사용 가능한 핵물질이기 때문에 매우 민감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까지는 평화이용 목적에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는 조건으로 허용되는 상태였다. 그래서 1973년 9월까지는 프랑스에서 차관 자금을 받아 기술과 시설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여 사업이 상당부분 추진된 상태였다.

그런데 1974년 5월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한 이후 미국은 태도를 돌변하여 각국에 재처리 시설과 기술의 이전을 금지시키고 추진 중인 사업은 폐지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1976년 1월 표면상으로는 재처리연구사업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러나 재처리를 제외한 부분만을 모아 사업명을 화학처리대체사업으로 고치고 계속 추진하면서 평화이용 목적 핵연료국산화 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우리정부가 핵연료국산화를 공식 결정한 1976년 전후의 시기는 국가안보 정세 측면에서 매우 어수선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북의 핵개발 착수(1960년대)와 청와대 습격사건 발생(1968), 인도의 핵실험 성공(1974), 미국의 평화목적 재처리 금지 조치 등 안보 측면의 중요한 이슈가 연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핵연료국산화를 보다 강력하게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1976년 말 핵연료개발공단을 발족하고 대덕의 비밀장소에 핵연료개발공단(핵공단) 건설을 추진하여 77년 완공했다. 그런데 핵공단에서 민감기술 개발이 완전히 중단 되지 않고 있다고 의심할만한 결정적 증거를 미국이 포착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여 이것이 한미간의 핵의혹으로 발전해 갔다.

연이어 한미 관계에서는 한국 내에서 핵개발이 추진되고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전제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한국으로부터 미군을 철수하고 핵우산을 철거할 것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1975) 하였다. 이에 맞서 박정희 대통령은 핵우산을 철거할 경우 핵무기를 포함하는 생존 수단을 강구할 의지를 공포(1975)하여 한미 간의 대결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카터는 대통령 당선 후 1978년부터 핵우산 철거를 전제로 하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실제로 착수하는 행동 실행 단계에 진입했다.

이러한 국제정세 하에서 1976년 우리 정부의 핵연료개발공단을 중심으로 한 핵연료국산화 착수 결정은 단순한 원전용 연료 개발 착수라는 의미가 아니고 여차 하면 핵무기 개발에 도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카터를 간접적으로 압박하려는 박대통령의 의지도 내포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핵연료개발 연구 사업은 미국이 아닌 프랑스의 자금지원과 기술협력으로 추진되었고 민감한 기술로 의심될 수 있는 성격의 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조사후시험시설, 방사성폐기물처리시설).

그러기에 핵연료개발공단은 다른 출연연구소와는 달리 대덕연구단지 북쪽의 천혜의 요새 분지인 군용시설과 유사한 입지에 별도로 건설되었고 초창기에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과기처 장관, 원자력연구소장 등 몇몇 핵심인사만 전모를 알고 있는 베일 속에 가려진 사업이었다. 그러나 카터 대통령의 미군 철군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됨과 동시에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 한동안 핵연료개발 사업은 사실상 허공에 뜬 상태에 들어가고 핵연료개발공단은 거의 폐허화 되고 말았다.

하여간 카터 대통령의 재임기간인 1977-81년간은 원자력 연구 사업에 관한 한·미간의 불화가 지속된 시기였으며 아직도 그 당시의 상세한 내용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직후인 1981년 1월에는 급기야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간판을 내리고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개칭함과 동시에 서울의 원자력연구소는 폐쇄하고 대덕의 핵공단 자리로 통폐합하여 원자력이란 명칭이 제외된 한국에너지연구소란 명칭으로 간판을 달도록 가닥을 잡는 해프닝을 거쳐 원자력에 관한 양국 간의 불편한 관계는 해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원자력연구소의 수난과 제5공화국 정권 출범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수난을 거치는 동안 핵연료개발 사업은 빈사상태에 빠져 한동안 우왕좌왕하게 되었으며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이 갑자기 사라진 상태에서 동 사업을 순수한 경제성 측면에서만 볼 것이냐 아니면 국가안보 측면의 여운을 남길 것이냐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이 결여된 체 한동안 국가 정책결정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갑작스런 한국원자력연구소 폐쇄명령과 베일에 가려진 그 명령의 배후
전두환 정권의 초대 과기처 장관으로 육사 출신의 이정오 박사가 1980년 9월 과기처 장관으로 임명 되었는데 그는 육사 졸업 후 미국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후 KAIST 교수 등 학자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행정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인사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나는 원자력개발국장이었으나 나도 기술협력국장직에서 원자력개발국장으로 전보 된지 1개월 밖에 되지 않아 원자력 업무에는 과히 익숙하지 못한 때였다.

이정오 장관은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를 장관실로 불러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갑작스런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의 배경이나 이유에 관해서는 전혀 설명도 없이 일방적인 단호한 명령이었다. 과학자 출신의 장관이 장관직에 임명되자말자 우리나라 최고의 국립 연구소 중의 하나인 원자력연구소를 이유 없이 갑자기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뜻밖이고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나 놀랍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지시였기 때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 그날은 별 말씀 못 드리고 다만 검토보고 하겠다고 말하고 장관실을 나왔다.

그 당시 전두환 정권 초창기에는 국보위가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있었고 육사출신이 관료의 요직에 배치되면서 파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직사회는 극도로 위축되어 말을 극히 조심하는 분위기였었다. 따라서 그날 극히 이례적인 장관의 지시인데도 변변히 그 배경과 이유를 물어보지도 못하고 장관실을 나왔다. 그런데 당장 곤란한 것은 이 지시가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전달되면 너무나 큰 충격으로 파국적 분위기로 치달을 것이 뻔하고 과기처 내부에 누설되어도 결국 파장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장관과의 대화가 좀 더 이루어져서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이를 당분간 일체 비밀에 부치기로 굳게 마음먹고 부처 내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우선 생각한 것은 그러한 엄청난 지시 사항은 원자력 분야에 문외한인 신임 장관이 임명되자 말자 누구와의 의논도 없이 간단히 결정하여 하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중요한 결정사항은 차관은 물론 부처 내의 중진들과 신중히 의논한 후 결정되어 하달될 중요 사항이었는데 차관은 물론 부처 내의 누구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학자인 장관이 그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능한 과학자가 집결한 기관으로 알려진 한국원자력연구소를 개인적 신념에서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가능성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장관 개인 차원도 부처 차원도 아닌 결정이라면 이정오 장관의 그러한 지시는 아마도 정권 차원의 특명을 받아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특임 장관으로 임명된 것이 그 배경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이르게 되었다.

그 당시 누구도 이정오 교수가 괴기처 장관으로 발탁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으며 취임 후에는 그가 육사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정권 출범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뿐이었다. 그러나 이정오 장관은 그러한 지시 사항의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퇴임 후에도 전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망과 더불어 재임 당시의 극적인 돌출 명령들은 영원한 비밀로 남게 되었고 그 후 서서히 나타난 증거들을 짜 맞추어 그러한 돌출 명령의 배경을 추측해 볼 따름이다.

◆정권 출범 차원의 조치라는 추론의 근거
제5공화국 정권 출범 차원의 특명이라면 전두환 정권 출범 과정에서 그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하여 그 배경에 관해서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후일에 그 지시 사항은 정권 출범 시에 한미 관계의 정리와 연관된 사안 즉 핵개발 의혹과 관련하여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한다는 밀약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속속 알려지거나 밝혀졌다. 또한 그러한 추론만이 신임장관의 돌출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대한 이러한 조치가 제5공화국 정권 출범 차원의 한미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동일한 시기에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미사일 팀이 해체되고 800여명의 과학자들이 해고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는데 미국은 미사일과 함께 핵개발 의혹을 정리하는 차원 즉 대량살상 전략무기와 연관될 수 있는 소지를 말살하는 차원에서 미사일 팀과 한국원자력연구소를 동시에 폐쇄할 것을 정권 인정 차원에서 요청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돌아가신 김성진 장관이 정권 출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특사로로 미국 정부를 방문했는데 그 때 미사일팀의 해체를 정권 인정 차원에서 미국 정부가 요청했는데 귀국 후 국방과학연구소의 소장에 임명되어 미사일 팀의 해체를 직접담당해서 처리한 사실이 뒤 늦게 밝혀졌으며 그 때 미국에서 미사일과 함께 한국원자역연구소의 해체도 요청했을 것이라고 증언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는 미국의 요청을 제5공화국 정권 성립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그 일을 김성진 장관과 이정오 장관에게 분담하여 처리하게 했다고 추론할 수 있게 한다. <다음 호 계속>

강박광 박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졸업(64년)
미국 루이지아니 주립대학 대학원 화학과 연구원 재직(73년)
과학기술처 과학기술 심의관(74년)
과학기술처 원자력국 안전심의관(77년)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79년)
과학기술처 원자력개발국장(80년)
과학기술처 원자력안전국장(81년)
과학기술처 원자력국장(81년)
과학기술처 동력자원연구조정관(83년)
과학기술처 기초종합연구조정관(85년)
주미 한국대사관 과학관(86년)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조정실장(차관보 88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원장(91년)
한국화학연구원 원장(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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