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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연구소 폐쇄 조치 마침내 한국에너지연구소로 개칭"[특별인터뷰]전 과학기술처 원자력 국장 강박광 박사
핵공단 흡수통합 원자력안전센터 설립 외견상 완전히 사라져
   
<납득 불가능한 어색한 폐쇄명령 배경 설명과 나의 반박>
장관은 정권 성립 차원의 밀명을 받았다는 얘기는 끝내 못하고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해야 하는 이유로 다음 두 가지를 더듬거리며 말했다.

첫째로는 거대 국가사업인 원자력발전소 건설 및 운영이 이처럼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어 도대체 언제 핵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이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원자력발전소 안전성에 관한 전문가는 태부족이고, 원자력발전소에서 조그만 문제가 있어도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여 미국 전문가를 초빙하는 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이에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원자력발전기술 분야 중에서도 핵반응이 일어나는 원자로와 핵연료 분야 전문가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주류를 이루어야 하는데, 지금의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방사성동위원소의 농학적 이용 등 비주력 분야의 전문가가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주력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확보에도 도움이 안 되고 원자력발전기술 자체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니까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나는 말 못할 보다 큰 이유는 감추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적당히 머리를 짜낸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정오 장관은 장관 취임 전에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기계분야 교수였는데 원자력 분야는 문외한 이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둘러대어 한 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항변했다. 그러면 원자력발전소 핵사고 방지 등 안전성 확보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원자력발전기술의 자립화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의 이유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는 것이 이 두 가지 문제의 해결책이냐고 반문했다. 또한 이 두 가지 이유가 문제라면 장관 재임 기간 중에 한국원자력연구소를 개혁하여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놓으면 유능한 장관으로 평가받을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랬더니 말문이 막혔는지 그 자리에서 “원자력위원들은 뭐하고 앉아 있어? 그 사람들 당장 내쫓아!”라고 소리쳤다. 나는 “국장급인 제가 어떻게 저보다 더 고위직인 원자력위원들을 내쫓을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보기도 싫으니까 과기처에 있는 원자력위원 사무실을 폐쇄해!” 라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원자력위원 두 분을 얼마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 위원 두 분은 영문도 전혀 모르고 한동안 피신하고 있었다.

<이정오 장관의 극적인 심경 변화와 위장전략의 발아>
내가 이와 같이 강력하게 반박하니까 장관은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는지 한번 이야기 해봐!” 라고 했다. 나는 “하나는 원자력발전소 안전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로 기술자립 문제이니까, 그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워 추진하면 해결될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 궁지에 몰린 장관은 대안 수립을 명했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이 장관이 무언가 잘못 생각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돌려먹기 시작했던 때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의 장관의 심경변화는 그러한 말이 한마디도 없었으나 나만이 이심전심으로 느꼈던 것으로 한국원자력연구소를 어떤 방법으로든 살리고 후일 원자력발전기술 중심의 원자력 연구체제 확립을 이루겠다는 심적 변화라고 추측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살린다는 말은 그 후의 장관 행동에서 들어난 것으로 다음에서 설명하는바와 같이 외형상으로는 확실히 폐쇄되어 사라졌는데 그 실체는 살아 있는 위장전략 방법을 동원한다는 의미이다.

   
▲ 1981년 11월 원자력안전국장시절 '한-독 원자로 안전성 공동세미나'
<원자력연구소 구명을 위한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 수립>

<원자력연구소 구명을 위한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 수립> 나는 그 당시 서울 태능에 위치한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뛰어 들어 갔다. 그곳에 모든 자료가 있으며 비밀작업을 하기에 편하기 때문이었다. 차종희 박사가 소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그런데 장관이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말은 발설 할 수 없었다. 또한 원자력연구소의 일대 개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는 말도 발설 할 수가 없었다. 행정경력이 있는 장관이라면 그러한 돌출 지시 이전에 비밀리에 면밀한 준비단계를 거쳐 봉착할 난관에 관한 대책을 심층 검토 후에 실행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고 갑자기 봉착한 난관이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비밀에 부쳐 함구한 체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도착하자 나는 다만 작업실을 하나 준비해 주고, 그리고 작업할 것이 있으니 좀 지원해 달라고 차종희 소장에게 요청했다. 그때 이상훈(후일 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 박사가 많이 도와주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작업이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 이었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폐쇄를 막기 위한 대안으로 제일 먼저 황급히 수립한 계획이 원자력안전센터(현재의 원자력안전기술원) 설립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상훈 박사는 영문도 모르고 단순히 협력하기만 했다.

원자력안전센터 설립계획을 황급히 만들어 장관께 보고했더니 장관이 그제야 연구소를 폐쇄하는 것이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다시 느낀 것 같았다. 이 때 폐쇄 명령 철회와 대안 모색을 내심 굳혔다고 생각한다.

<이정오 장관의 위장 전략>
그 후 국보위 또는 그 이상의 당국과 협의를 했는지는 모르나 이정오 장관은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하는 대신에 이름을 바꾸어 원자력이란 단어를 연구소 명칭에서 빼어버린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바꾸고, 명칭이 바뀐 서울 태능의 한국에너지연구소(구 한국원자력연구소)는 대덕의 핵공단을 흡수통합하여 대덕으로 이전토록하고, 원자력안전센터를 그 부설로 설립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완전히 사라지고 미국이 제공한 원전의 안전을 중점 연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조개혁 방향으로 유도해 갔다. 즉 이승만 대통령 이래 존재해 온 한국원자력연구소의 명칭과 소재지는 외견상으로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으나 그 실체는 남아있도록 하는 위장전략 조치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들은 과기처 산하 출연연구소 전체를 구조조정 하는 큰 테두리에 포함되어 기획관리실 주도하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한국원자력연구소에 대해서만 특별한 조치가 취하여 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조치되었는데 그 부분은 내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내용을 나와 사전협의도 하지 않아 실행될 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출연연구소들은 정권이 바뀌면 의례히 있는 파격적 구조조정이라 생각할 다름이었다. 이는 미국의 압력을 피함과 동시에 원자력연구소 내부의 반발을 최소화 하는 방법으로 외형상으로는 서울의 한국원자력연구소를 폐쇄한 것으로 보이나 실체는 남아있게 한다는 위장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구조조정 방침은 1980년 11월에 각 해당 출연연구소에 통보되어 실행에 착수하게 되었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그해 12월에 제일먼저 핵연료개발공단을 흡수통합하여 핵개발 의혹의 소지를 소멸하는 조치를 취했고 다음해 1981년 1월에는 한국원자력연구소법을 한국에너지연구소법으로 개정하여 연구소 명칭 개칭 및 핵연료개발공단을 흡수통합하는 법적근거를 마련하였다. 일반적으로 법개정 후에 통폐합을 실행하는 것이 순서이나 이 경우 서둘러 실행한 후에 법을 개정하는 순서를 택한 것도 정권 차원의 큰 힘이 배경에 작용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극비리 미군 극동지역 핵사령부 요원 방문 : 배후 큰 힘 작용의 방증>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관한 구조조정 방침이 결정되어 이와 같이 실행되기 시작한 그 즈음 나는 또 한 가지 기이한 일을 겪었다. 1981년 초 어느 날 주한 미대사관의 과학담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극비리에 꼭 만나야 할 사람을 그가 모시고 올 테니 누구한테도 비밀로 하고 만나달라는 부탁이었다.

과학담당관은 미군 대령 한명과 신사 한 분을 대리고 내방에 나타났다. 미군 대령은 극동지역 핵사령부에 근무한다고 했고 신사는 하버드대학 국제정치학 교수라 했다. 우선 하버드대학 교수가 장시간에 걸쳐 북미 지역과 극동지역의 국제 핵정책에 관해 설명했다.

케네디 대통령 때 쿠바의 핵미사일 사건을 사례로 들어 강대국에 인접한 국가에 핵미사일이 도입될 경우 우방국이라도 무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만약 한국에 핵미사일이 개발된다면 어떤 사태가 극동지역에 벌어질 것인가를 몇 개의 가상 시나리오를 가정하여 설명했다. 중국은 직접 무력 공격을 시도할지도 모르며, 일본은 등달아 핵개발을 달성할 것이며, 미국은 한국에 대해 단계적 압력을 가할 것인데 1단계로 외교적 압력, 2단계로 경제적 제재, 3단계로 무력진압 등의 방법을 택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한테 그러한 내용이 담긴 1,000여 쪽에 달하는 두툼한 자료를 건네주었다. 그 것은 세계의 핵정책과 그 역사에 관한 자료로서 MIT, 하버드 등의 교수들이 작성한 논문이었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우리는 민감 기술 개발을 완전히 포기했으며 오로지 미국이 공급한 원자력발전소의 운영에 필요한 안전 및 활용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개발만을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랬더니 대령은 대만의 경우 핵개발 의혹을 벗기 위해 그들이 소유한 연구용 원자로를 세계 기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가운데 폭파해 버렸는데 한국은 그렇게 할 용의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의 경우 대만과는 달리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전력 수요가 막대하며 저렴한 가격의 전력 공급은 산업경쟁력 확보를 위한 절대적 조건이기 때문에 원자력발전이 필수적이며, 원자력 발전을 실시하는 한 안전을 위한 기술 확보를 위해 관련 연구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핵의혹이 있다고 생각하면 주한 미국 과학담당관이 언제 어디에라도 접근해 의혹을 풀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설명했다.

나는 느닷없이 그들이 핵의혹을 화제로 갑자기 나를 방문한 이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의 방문은 원자력연구소 폐쇄명령의 배후 내막과 연관된 것이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의혹 말소 압력이라 가정할 때 내 나름대로 납득 가능한 해석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정오 장관의 원자력연구소 위장 전략에 관한 정보를 이미 알고 나를 방문했다고 생각된다. 그 의미는 정권 출범 조건으로 약속한 합의를 어기고 있지 않느냐고 은근히 압력을 넣기 위해 실무 담당자인 나를 방문해 온 것이라 해석된다. 그러나 실무국장인 나로부터 핵개발 의사는 전혀 없으며 오로지 미국이 공급한 원자력발전소의 이용 및 안전기술 개발에 전념하겠다는 반응을 보고 조용히 물러난 것이라 해석된다.

 

김소연 기자  ksy@knp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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