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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순 박사 애국심이 '대한민국 원자력자립국' 기틀 마련"[특별인터뷰]강박광 전 과학기술처 원자력국 국장(박사)
핵연료 핵증기 공급 시스템 국산화

원자력발전기술은 핵반응을 일으키는 장치인 원자로 관련 기술과 그것을 일으키는 핵물질인 핵연료 관련 기술 등 두 부분이 핵비확산 측면에서 국제적으로 민감한 기술로 간주되고 있어 기술이전을 꺼리게 되는 대상 기술이 되고 있다. 이들 중 원자로 관련 기술의 자력 개발은 투자액이 후진국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고 핵연료 관련기술은 투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아 후진국의 매력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핵연료 기술자립에 선행 도전하고 원자로 기술자립을 그 다음으로 추진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구세주로 등장한 한필순 박사와 자력 개발로 핵연료 국산화 성공>
이러한 어려운 기술자립 문제를 풀기위해서 구세주로 나타난 사람이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대덕공학센터 분소장(구 핵연료개발공단 단장)으로 1982년 스카우트된 한필순 박사였다. 한필순 박사는 1983년 핵연료주식회사의 사장도 겸임하고 1984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되어 살신성인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전두환 대통령과 당시 한전의 박정기 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어냄으로서 원자력 기술자립을 화려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원자력과 관련하여 이루려했던 목적 중 평화이용 부분은 전두환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한필순 박사가 이루어낸 것이다.

한필순 박사는 모든 것이 중단되고 폐허상태로 전락한 핵연료 국산화 사업을 다시 추슬러 자력 개발에 성공하는 기적을 이루어 낸다. 그의 특유의 집념으로 한전을 설득하여 연구 자금을 얻어내는 뚝심을 보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원자력기술자립의 첫 번째 도전으로서 자력으로 이루어낸 핵연료 기술의 자립은 민감한 부분의 원자력 관련 기술 중 절반을 국산화했음을 의미한다.

민감 부분 원자력 기술의 자립은 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강력한 리더십, 현명한 정책결정 능력, 유능한 전문인력, 세계적 정세 등 모든 조건이 맞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이루어낸 핵연료 국산화 성공은 큰 의미를 갖는다.

<원자로 관련기술 자립>
연이어 한필순 박사는 원자로 부분의 국산화에 도전하여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원자로를 포함하는 핵증기공급시스템과 관련해서는 후진국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상용시설과 동급의 대규모 원전 시험시설을 실제로 건설하여 상당 기간 직접 시험 운전해 보아야 경제성과 안전성 확인이 가능한데 그 비용이 원전 도입 건설비 보다 큰 막대한 규모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고 잘못해서 사고가 날 경우 대규모 원자력사고로 이어지는 위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계 수준의 핵무기 능력을 가진 중국도 최근 까지 원전의 핵증기공급시스템의 국산화는 달성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가능한 방법은 건설 중인 핵증기공급시스템의 설계도와 그 작성기술을 원전 공급선으로부터 직접 전수 받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것 자체가 거의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이 국제관례인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의 돌파구를 찾아서 현명하게 기술자립을 이룬 것은 천운이 따라서 기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79년 미국 TMI 원자력발전소의 대규모 원전사고 발생이었다. TMI사고 이후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물론 미국에서도 원전 건설이 거의 전면 중단되었고 제너럴일렉트릭, 웨스팅하우스 등 원전공급사 들은 갑자기 일감이 사라져 매우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계속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독점적 바이어스 마케트(buyer's market) 입장에 처하는 천운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천운의 기회를 현명히 이용하여 꺼려하는 민감기술 이전을 가능케 하고 원전기술 자립이란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 원전 공급자는 생존을 위한 수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민감기술 이전 조건을 포함해서 우리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핵의혹 탈피를 위해 오로지 원자력 평화이용에만 전념한다는 모양을 갖추기 위해 원자력발전기술 개발에 전념하는 혁명적 변신을 거친 원자력연구소는 그 대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서 세계적 관심을 받는 연구소로 발전했다.

<호사다마 때문에 한필순 박사와의 또 한번의 인연>
기사회생한 원자력연구소는 한필순 박사가 소장에 임명된 1984년 이후로 우리나라 원자력발전기술 자립에 있어 다른 개도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이루어내면서 승승장구한다. 특히 앞에서 기술한 원전과 관련된 두 가지 민감기술분야인 핵연료와 원자로(핵증기공급시스템) 분야의 상용기술 자립을 기업이 아닌 원자력연구소가 주도하여 이루어 내는 세계 원자력 사상 초유의 기적적 성공을 이루어 내었다.

이는 한필순 박사의 저돌적 추진력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는데 너무 강하면 뿌러진다는 속담과 같이 한 박사의 뒷다리를 걸고넘어지는 적대 세력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1988년 노태우 정권의 출범과 함께 공포된 민주화 선언은 야당에 힘을 실어주어 군사정권 동안에 이루어진 비리를 철저히 파헤치는 방향으로 사태가 진전되면서 야당이 한필순 박사를 비리 척결 대상으로 괴롭히는 사태까지 겹쳤다.

적대세력은 가공할 거대 기업인 웨스팅하우스사였는데 영광 3&4호기 입찰에 있어 한 박사 때문에 실패했다고 화풀이에 나선 것이었다. 그 내역은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낸 한 박사가 그 후광을 업고 영광 3&4호기의 발주에 있어 민감기술 부분인 원자로부분의 기술이전을 원전공급자로부터 기필코 받아내는 크나 큰 임무를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기술을 주겠다는 CE사로 낙찰이 결정된 것이었다.

이로서 웨스팅하우스사는 한 박사가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CE사의 노형을 결정했다는 안전성 논쟁을 일으켜 2년여 동안 괴롭혔으나 아무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 후 야당에서는 5공비리 척결 조사 대상에 영광3&4호기 입찰사업을 포함시키고 한 박사가 수뢰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여 검찰이 관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검찰은 6개월간의 조사 후에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1989년초).

대형 비리 적발을 기대하고 시작했으나 무혐의로 결론이 나자 야당 국회의원들은 이번에는 원자력연구소가 원전기술자립 명분으로 영광3&4호기의 건설비를 20% 부풀렸다고 주장하면서 걸고넘어졌다. 순진한 과학자인 한필순 소장은 이러한 정치 놀음에 휘말려 지긋지긋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원자력연구소에서는 그 때쯤에는(1989년 여름) CE사로부터 원전 핵심설비인 핵증기공급시스템의 설계기술 전수가 순조로이 이루어져 원자력연구소의 핵심 설계요원 100여명이 CE사 본부 설계사무소인 원저(Windsor, Connecticut/New York 동북쪽 약 200 km) 시에서 비장한 각오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핵심설계기술(원자로계통설계기술) 전수에 그들의 직을 걸겠다는 맹서를 하고 성공 못하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오로 만세삼창 후 연구소를 떠나온 자랑스러운 전사였다. 그 때 그 기회를 놓치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원자력 기술 식민지에 빠져들고 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분골쇄신 싸우는 전쟁터였다.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소속 야당 국회의원들은 바로 그 때(1989년 9월) 비리현장 조사라는 명분으로 윈저 설계사무소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 대목에서 한필순 박사와 나와의 인연이 한 번 더 발생한다. 1983년에 원자력 업무를 떠난 후 나는 과기처 내의 몇몇 국장직을 거친 후 1986년 이후에는 워싱턴의 재미 한국대사관에서 과학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1989년 9월 야당 출신의 국회 경제과학위원회 위원장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야당 의원이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직감적으로 한필순 박사와 연관된 일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나서 몇 군데에 연락을 취한 결과 앞에서 설명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이 일만은 내가 나서서 한필순 박사가 얼마나 애국자이고 나라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 순수한 과학자임을 설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 나는 CE사에 연락하여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접을 부탁했다. 야당의원 일행은 9월 어느 날 낮에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후 뉴욕 시내 최고급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CE사가 초청하는 선상 만찬 파티에 초대되었다. 선박은 중급의 한강 유람선 크기의 최고급 요트였으며 뉴욕을 감싸고 흐르는 하드선 강위에 배를 띄워 놓고 찬란한 석양을 배경으로 최고급 레스터랑 분위기에서 최고급 만찬 요리를 즐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내가 미국에 가 있은 지 3년째였으나 그러한 고급 선상 파티는 처음 경험했다. 그날 야당 의원들은 매우 만족한 분위기였다.

이튿날 아침 야당의원 일행은 윈저로 떠났다. CE사는 고급 캐딜락 승용차 몇 대를 제공했으며 나는 경과위 위원장 옆자리에 탔다. 원저는 뉴욕 동북쪽 약 200 킬로 거리에 있어 한나절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윈저에 가는 동안 앞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개도국이 원자력기술자립을 이루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천운이 따라야 가능한데 그러한 기회가 신통하게도 우리에게 주어져 기적을 이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필순 박사가 주도하고 있으며 원자력기술자립에 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진 과학자라 설명했다. 이어서 나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우리가 영원한 원자력 기술 식민지에 빠지게 될 것이라 했다. 끝으로 이제 곧 당신은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무장되어 성공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만리타향에서 분골쇄신 싸우고 있는 애국 전사들을 만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야당 의원들은 더디어 오후에 윈저 현장에 도착해서 우리 과학자들이 비상한 각오로 일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격려의 말을 늘어놓았다. 특히 경과위 위원장은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나는 목격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그들이 귀국하여 더 이상 한필순 박사를 괴롭히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석우 기자  dolbi2004@knp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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