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신문 특집] KEPIC by kepic
김종해 대한전기협회 KEPIC처장

“1980년대 후반 당시 원자력발전소를 비롯한 국내 전력설비에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등 다양한 국가의 표준이 적용됐었다. 이는 언어상 문제, 다른 나라의 제도 활용에 따른 불합리성과 과다한 비용의 해외 지출 등 문제를 야기 시켰으며 기술자립과 국제경쟁력 확보에 걸림돌로 작용됐다. 결국 우리만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술기준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전력산업계에도 대들보 구실을 하는 단체표준이 하나 있다. 바로 전력산업기술기준(Korea Electric Power Industry Code, KEPIC)이다. KEPIC은 전력설비의 재료, 설계, 제작, 시공, 시험, 검사, 운전 및 보수 등에 필요한 기술 및 제도적인 요건을 집대성한 전력산업계 단체표준이다. 1987년 기술독립의 필요성에 의해 개발된 KEPIC은 국내의 많은 전력설비에 적용되며 기자재 품질향상 및 전력설비 안정성에 큰 기여를 해왔다.
특히 올해는 원전비리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으로 인해 KEPIC은 물론 원자력과 대한민국 전력산업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동안 전력산업이 쌓아올린 성과가 이대로 무너지도록 두고 볼 것인가. 이제 다시 일어서야 할 때다.
지난 20일 ‘2013 KEPIC-Week’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김종해(사진) 대한전기협회 KEPIC처장을 만나 KEPIC의 지난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봤다.
김 처장은 “최초 울진 5?6호기에 시범 적용할 때 이미 건설허가를 취득하고 ASME나 IEEE와 같은 해외표준의 적용이 확정된 상태에서 A/E를 설득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며 “다행히도 제도 요건을 적용할 수 있는 여건이 확보돼 울진 5?6호기를 비롯해 시공 3사인 동아건설, 두산중공업, 삼성건설이 KEPIC 인증을 취득함으로써 KEPIC 적용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KEPIC 최초 적용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특히 당시 발전사업자인 한국전력이 솔선해서 KEPIC 인증을 취득함으로써 산업계의 KEPIC 인증에 대한 부담과 거부감을 해소시킬 수 있었으며 신고리 1?2호기부터 전면 적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김 처장은 “KEPIC이 가진 큰 장점은 전력설비에 적용하는 모든 표준을 한데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용이 편리하다는 것”이며 “그 동안 전력설비에 다양하게 적용해 표준의 정확한 이해를 통한 기자재 품질 제고는 물론 상당한 비용 절감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UAE 원전 적용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해외 전력시장에서 통용될 수 있도록 KEPIC이 다루는 분야에 대해 활용성이 높은 표준을 개발해 나갈 것”이라며 “무엇보다 기술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소기업이 KEPIC을 보다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폭넓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올해도 어김없이 ‘KEPIC-Week’ 그 대단의 막을 올리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특히 올해는 원전비리 시험성적서 위조파문으로 KEPIC이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은 탓에 행사 준비에 더 각별할 것 같다. 지금까지의 준비 상황은 어떠한가.
“원전부품 시험성적서 위조 사건이 터지면서 이를 주도한 국내 민간검증기관인 새한티이피가 검증설비와 인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여론과 더불어 KEPIC 기기검증 시험기관 인증제도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KEPIC 인증과 관련된 제도 개요, 심사기준과 절차 등에 대해 감사원 감사를 수감했다. 물론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처음에는 당혹스럽기도 했으나 충분히 설명해 이해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됐고, 반면에 심층감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물론 어수선한 상황에서 가끔은 ‘올해 KEPIC-Week 행사를 제대로 개최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 보기도 했지만 이럴 때 일수록 ‘KEPIC-Week’를 당초 기획 의도를 뛰어 넘는 행사로 준비해서 KEPIC이 전력산업계에 널리 활용되고 중요한 도구임을 재확인할 수 있는 ‘의미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KEPIC-Week 행사가 단순한 정보교류와 만남의 장을 넘어 현재 전력산업계에 닥친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실질적인 행사가 되고, 서로에게 힐링이 되고 재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KEPIC을 통한 전력산업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더욱 무겁게 느끼고 있다.”

-올해도 지난해와 같이 ‘Advanced Standards&Global Partner’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그 주제가 담고 있는 의미를 설명한다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글로벌 시대, 표준은 국가경쟁력 우위확보를 위한 전략적 도구이자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말 그대로 ‘표준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협회는 ▲KEPIC의 표준화 기술 선진화를 통한 국제적 민간단체표준과 대등한 수준으로의 도약 ▲국내 기술 집약을 통한 독창성 확보 및 국제표준화 선도 ▲국제표준과 조화된 표준화를 통한 국제적 활용기반 확대 ▲국내·외 산업여건에 부합하는 최적의 기술요건 제시 등에 따른 경제적 효과 창출을 위해 ‘KEPIC 2020 비전’인 “Advanced Standards&Global Partner”를 행사 주제로 거듭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KEPIC의 선진화를 조기에 달성해 국제적 민간단체표준과 대등한 수준으로 도약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KEPIC 비전 실현에 박차를 가하자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지난 26년 동안 원자력 분야를 넘어 화력, 송·배전 분야에 활용된 KEPIC의 성과는 실로 놀랍다. 과연 KEPIC이 어떤 효과를 거뒀다고 자평하는가.
“원자력발전소의 경우 ASME 표준을 적용해 기자재를 구입하였을 때와 KEPIC을 적용했을 경우를 비교해 보면 적게는 24%에서 많게는 53%까지 구매비용을 절감한 사례가 있다. 현재 건설 중이거나 건설이 추진될 10기의 원전에서 국내 공급 보조기기 구입에 KEPIC을 적용할 경우 예상할 수 있는 기자재 구입비 절감액은 최소 1375억 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KEPIC과 이에 상응하는 외국의 참조표준을 구입할 때 발생하는 비용 차이를 분석해 볼 경우 5년간 표준 구입비용 절감액(평균 200부 적용)이 114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KEPIC이 거둔 효과에 대해서는 경제적 측면에서 눈에 보이는 효과도 있지만 무형의 효과도 매우 크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정도라고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한글로 된 표준인 KEPIC이 현장 작업인력들의 적용 편의성을 높이고, 외국표준 및 인증제도 적용에 따른 부담을 크게 해소하면서 관련 기술수준의 향상과 품질제고 등 다양한 효과를 거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과거 ASME 인증제도는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 책임이 없는 외국 기관에 의존하는 형태였지만 KEPIC 인증 제도를 통해 우리 주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며 이러한 국내 제도와 기자재를 사용하고 공급선이 다양화함으로써 기자재 비용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의 지속적인 원전건설 및 다양한 노형의 운영경험은 KEPIC 요건을 보완하고 개선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러한 국내 경험과 선행기술을 피드백시킬 수 있는 KEPIC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전력산업계의 큰 자산이다. 물론 화력분야에서 아직도 KEPIC 적용에 소극적인 기술자들이 많지만 2010년 준공한 영월천연가스발전소(848MW)의 경우 외국표준을 대신해 KEPIC이 전면적으로 적용된 바 있다. 또 한국형 초초임계압(USC) 석탄화력인 신보령 1ㆍ2호기(1000MW급)의 KEPIC 적용 결정은 좋은 모범사례가 될 것이다. 아울러 최신형 대용량 발전소의 KEPIC 적용을 통해 기술 집약과 경험 및 신기술 축적에 따른 시너지 효과로 기술발전이 가속화될 것이다.”

-KEPIC 인증을 취득하려는 국내 업체들의 경쟁이 뜨거웠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일단 인증을 따놓고 보자’는 식의 과열양상이 현재 원자력계에 닥친 위기를 자초한 발단이라는 지적도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품질제고를 위한 KEPIC의 역할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관련업계는 “대거 KEPIC 인증을 획득함에 따라 품질 저하 가능성 우려된다. 인증 심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다. 인증 심사 진행 시 기술적 사항을 강화하고, 다른 인증심사와의 차별화를 통해 KEPIC 인증의 퀄리티를 높이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KEPIC 인증 시행 초기에 인증을 취득한 업체는 대부분 원전사업 참여 경험이 있는 업체들이라 오히려 부담이 적었다. 이후에는 원전은 아니더라도 플랜트산업 경험이 풍부한 중견기업들이 참여함으로써 동일 품목에 대해 복수의 업체가 육성됨으로써 건전한 경쟁 기반이 마련됐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인증취득 희망업체가 증가하면서 원전 안전성 확보에 기여한다는 KEPIC 인증제도의 근본 목적을 지키기 위해 심사를 강화하고 있다. 즉, KEPIC 인증 제도를 통한 관련업체의 육성이라는 목적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고 보며 이제는 업체들 스스로 해외 시장 참여를 위한 체질 강화도 필요하다.”

-특히 시장 지배력이 강한 사실상표준(ASME)을 뛰어넘어 국제표준이 되기 위한 과제는.
“1995년 발효된 WTO 체제하의 TBT 협정에 따라 각국 표준은 국제표준(공적표준이든 사실상표준이든)과 조화(Harmonization)하는 것이 추세이다. 최근 다국간설계평가프로그램(MDEP, Multi-National Design Evaluation) 활동을 통해 원전표준 보유 6개국 대열에 들어서 있음을 국제적으로 당당하게 알리게 됐으며 KEPIC은 Harmonization(부합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ASME Code에 대응되는 한국의 표준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KEPIC은 ASME와 같은 사실상 국제표준을 수용해 오는 입장이었지만 KEPIC 중장기계획에 따라 앞으로는 R&D 결과나 국내 선행기술을 적극 반영하고, 해외표준기관에도 적극 제안하고 공유해 채택되도록 함으로써 능동적인 국제표준화 활동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 KEPIC처에 새로운 변화들이 눈에 띈다. 특히 이달 초 KEPIC처 조직개편이 이뤄진 것으로 알고 있다. 조직개편 배경과 그 내용을 설명한다면.
“최근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KEPIC 스탭 조직의 전문성이 매우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번 개편의 특징은 기술과 행정관리에 대한 책임을 이원화해서 운영하는 것이다. 각 기술분야 담당자들의 전문성 향상과 기술적 현안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 KEPIC 위원회(정책위원회-전문위원회-분과위원회) 체계의 기술그룹별 책임제로 운영하고 1인 1개 이상의 전문 분야를 지정, 꾸준한 교육과 경험을 통해 전문성을 키워 나가도록 하였다. 이와 병행해 행정관리 기능별로 팀 체제를 재편하여 스탭으로 고유 기능을 수행토록 했고, 앞으로 각 업무 담당자들이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순환시켜 나갈 계획이다. 즉 기술 분야는 꾸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축적시키고, 행정관리 분야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개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 토론회에서 KEPIC 정책위원장이신 이창건 박사께서 “KEPIC이 남북통일 후의 우리나라 Code & Standards가 되기 위해서 이번 사건을 통해 궤도수정 과정”이라며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럼 KEPIC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원자력계 원로로서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시는 당연한 말씀이라고 본다. 최근 전력산업계의 어려움은 위기라기보다는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오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재확인해서 정비해 나가는 숨고르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KEPIC도 이번 일을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을 것이며, 더 넓고 먼 곳을 향해 고민을 해 나갈 것이다. 과거 골드만삭스에서는 남북통일이 된다면 남북간 표준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비용이 통일 후 10년간 7700억 달러에서 많게는 3조5000억 달러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KEPIC이 통일 후 전력산업 분야의 표준이 되기 위한 특별히 거창한 목표를 설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 목표하고 있는 것처럼 KEPIC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개발하고 국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꾸준히 추진해 나간다면 남북통일 후에도 자연스럽게 전력산업 표준으로서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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