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건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 원장

옛날 우리 사회에선 중국문물을 남보다 빨리 더 많이 입수하는 사람이 인텔리를 자처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지나쳐 썩어 빠지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추종하다가 야만이라던 여진족에게 굴복하여 드디어는 임금이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 세 차례 꿇어앉고 이마로 땅을 아홉 번 두드리는) 의 예를 올리고서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왕자와 귀족들과 많은 부녀자들이 만주로 끌려가고 오래도록 속국의 멍에를 메고 고통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 모두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었다.

한국전 휴전 이래로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은 일본경제 시스템을 본받아 성장했고 그러는 동안 “잘 살아보세”의 경지를 넘어 이제는 선진공업국 문턱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제도를 모델로 삼겠다는 기업은 별로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세계정상에 오른 산업이 여러개 생겨났고 그래서 지금까지처럼 남을 뒤쫓아 가 던 자세에서 이제는 세계를 이끌어 갈 선구자적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음을 말하는데 그중 하나가 원자력산업일 것이다.

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로마제국에서는 근육이 실하게 붙고 배는 불룩했으나 가슴이 차갑고 머리가 비어있음을 자각한 인텔리층이 옛 그리스 문명을 모방하자는 르네상스 운동을 벌렸다. 즉 경제력과 무력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너도나도 고대 그리스 공부에 열을 올려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런 문화적 관성이 금세기까지 이어져 유럽 유명대학들과 미국 Ivy League에서는 아직도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강좌가 성행하고 있고 졸업장을 라틴어로 발행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본받자는 나라가 있을까? 현재 이 두 나라가 골칫거리로 전락하여 EU의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옛 영광에 안주하여 개혁과 혁신을 게을리 한 탓일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조상을 잘 만난 탓에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적을 남에게 보여주고 받는 관광수입으로 나라살림의 큰 몫을 메꾸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시간에도 두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평면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 (Χρόνος) 로서 보통사람들과 동물이 먹고 싸고 잠자고 새끼치는데 사용하는, 즉 시계로 측정 가능한 시간이다. 또 하나는 농축·압축되고 거기에 하늘의 메시지가 가미된 고차원적이고 축시법 (縮時法) 적인 시간인 카이로스 (Καιρός) 이다.

카이로스적인 소프트웨어 개념을 하드웨어 방식으로 풀이한 분이 Albert Einstein이었다. 그는 시간도 상대적이며 공간조차도 휘어질 수 있고, 질량과 에너지의 본질은 하나인데 다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을 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크로노스는 평면적이지만 카이로스는 입체적이며, 전자가 화학반응이라면 후자는 핵반응과 같다. 하나는 흘러가는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고 잊혀지는 태반의 무리에 해당되는데 반해 다른 하나는 역경 속에서도 역사를 창출하는 극소수의 주인공을 주제로 한다.

나는 카이로스적 삶을 영위한 인물로, 뭇 신하들의 반대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드디어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적의 군함 몇 백 척이 몰려오는 도전에 결연히 일어나 “신 (臣) 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며 응전한 이순신을 들고 싶다. 출산이 가까워오자 산모의 현몽 (現夢) 에 시아버님이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상국인 순 (舜) 나라의 충직한 신 (臣)하처럼 되라는 뜻으로 순신으로 이름지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신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조부께서 바라신 대로 그렇게 살고 그렇게 싸우다 죽었다. 그런 이순신이 있었기에 배에 깃발을 높이 꽂은 수많은 어민들이 몰려와 합세했고 그것을 본 왜군 함대사령관은 이순신 함대가 만만치 않다고 오판하게 되었을 것이다.

후쿠시마 참사 영향에 이어 우리 업계 일부의 불미스러운 사태로 국민과 여론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받은 이 나라 원자력계는 문제를 크로노스적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카이로스적인 창조정신으로 난국을 뚫고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사태해결의 실마리를 해외에서 찾자고 제안하는 바이며 그것은 다음의 다 섯가지 사업에 열과 성을 다함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이 되자는 뜻이기도 하다.

1)최고수준에 달한 우리의 원전 설계, 건조 및 운영기술과 해수담수화 기술을 결합하여 중동지역의 사막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바꾸는 사업을 벌린다. 정상급인 우리 해수담수화 공정에서 원전의 온배수를 이용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Win-Win 전략이 될 것이며 세계 어느 경쟁자도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려고 최고와 최고가 단합하는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원전에서 전기와 물을 값싸고 깨끗하고 풍부하게 만들어 사막을 옥토화하는 멋진 그림과 조각품을 미술가들에게 의뢰해 그것을 중동국가의 실력자들에게 기증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2)지금 240기의 세계 연구용원자로중 70%는 30년이 넘은 노후로이어서 곧 교체하거나 신규발주하려는 연구로수는 50기에 이르고 있다. 우리는 연구로에 관한한 세계 2대 강국중 하나이며, 수출실적과 함께 현재 국내에서도 건설을 추진하고 있을 만큼 현역에 종사중인 강자이다. 연구로의 경우 원자로자체 보다는 부대 과학 설비비중이 큼으로 정부가 이의 연구개발에 미래창조적으로 투자해 주신다면 지난날 이 분야를 석권했던 미국의 자리를 우리가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조금만 밀어주면 여러마리의 대어를 낚게될 것이다.

3)지금 물위에 떠있는 선박의 반은 한국에서 만든 것들이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북극해의 얼음이 녹아 그 곳을 지나는 뱃길이 점차 열리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 부산에서 Rotterdam까지의 운항일수를 10일 단축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해 원자력계는 최고 경쟁력을 가진 조선업계 및 해양업계와 손잡고 원자력쇄빙선 설계·건조에 뛰어 들기 바란다.

4)지구환경보존과 자원보호를 위해 원자력수소 Project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인류가 Hydrocarbon 연료시대에서 빨리 탈피토록 하자.

5)고준위방사성 폐기물의 종말처분 방안을 꾸준히 추진해 나가자.

위의 4와 5는 세계적이고 세기적인 과제인 만큼 국제협력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12척에 해당하는 튼튼한 원자력산업기반과 우수한 인력 그리고 순신의 마음에 깃발을 품고 우리를 응원하는 국민이 있다. 또 자원고갈완화와 환경보전을 기하면서 인류문명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하는 역사적 소명이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면, 빈관론자는 닻과 돛을 거두어들이나 카이로스적 시간을 맛보려는 낙관론자들은 그것들을 올린다고 하니 다 같이 낙관론자가 되어 보자.

우리에겐 굶주리고 핍박받고 자유도 희망도 없는 2500만 북녘동표를 구출하여 그들과 함께 세계 초일류국가를 지향해야 할 책무가 놓여있으며 그 일을 이루는데 원자력계가 큰 몫을 맡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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