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균렬 서울대학교 원자핵공학과 교수

2001년 9월 11일 미국 항공기 동시다발 자폭 사건은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에 불을 지폈다. 미국은 이를 모두 테러와의 전쟁이라 미화했지만 속내는 석유와 가스 등을 둘러싼 21세기형 자원전쟁이었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북한과 이란 핵문제, 그리고 얼마 전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둘러싼 러시아, 미국, 유럽의 갈등과 같은 자연재앙과 국제분쟁 뒤에도 모두 에너지 문제가 깔려있다. 은밀하게 그러나 거대하게.

미래학자들은 최근 100년 동안 사회변화가 그 이전 1만년만큼 빨랐다고 한다. 나아가 앞으로 20년간 펼쳐질 변화는 최근 100년에 버금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에너지 중요성은 이처럼 빠른 시대변화와 정비례해 더 커질 것이다. 현재 7경 원에 이르는 세계경제 규모는 20년 뒤 2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세계인구가 100억을 바라보고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도 늘어날 것이고, 국가 간 갈등도 날카로워질 것이다. 20세기가 새로운 자원을 찾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21세기는 떨어져가는 자원을 챙기기 위한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국제유가 고공행진과 석유파동 재연예감은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려는 지구촌에 암영을 드리우고 있다.

북한과는 달리 이란의 핵문제엔 에너지라는 다차원 변수가 있다. 이란은 세계 3위 석유에다 세계 2위 천연가스 보유국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니미츠 해군제독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석유이고, 그 다음이 무기, 그리고 그 다음이 식량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러시아 사이 냉전이 도진 가운데 이젠 핵문제까지 얽히고 있다. 단 이번엔 원자폭탄이 아니라 자원전쟁의 고리다.

하지만 21세기 지구촌 에너지 경주는 석유나 가스가 아닌 원전으로 판가름 날 것이라 예측된다. 후쿠시마는 세계 에너지업계를 뒤흔들었다. 원전에 대한 찬반논란이 거세졌고, 안전이 강화됐다. 그럼에도 원전의 급격한 축소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국제에너지기구는 2035년 원전이 지금보다 3분의 2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까다로워진 규제로 건설속도가 떨어지긴 했지만 중국, 한국, 인도, 러시아 등이 증가세를 견인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세계 원전시장은 10년 뒤엔 800조 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수 조원에 이르는 1기 원전건설은 1만 명에 가까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71기 원전이 건설 중, 160기가 계획 중에 있다.

특히 러시아는 2020년까지 자국 내 원전설비를 2배로 늘린 거라 한다. 따끈한 러시아와 달리 미국은 다소 김이 빠진 모양이다. 안전규제와 더불어 셰일가스 등으로 인해 가격경쟁에서도 원자력이 매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흥국과 일부 선진국에서는 원전수요가 늘어가고 있다. 일본에서조차 노후원전 현대화가 슬슬 꿈틀대고 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다. 이때야말로 파리와 도쿄를 제치고 서울이 세계 원전시장에 한국풍을 다시금 불어넣어야 한다. 물론 원전을 절실히 바라는 국가 대부분은 자금이 달린다. 그러나 이들 나라에 융자 등을 하면서라도 시장을 뚫어야 한다.

원전은 완공된 다음에도 기술이전이나 유지보수 등 지속관계를 요하기 때문에 세계최고 건설기술과 운전경험을 가진 한국이 치고 나가야 한다. 100 미터 단거리가 아닌 100 킬로미터 넘는 장거리로.

한편 원전기술은 자칫 무력도구로 전용될 수 있다. 이란은 민간기술을 사용해 폭탄제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파키스탄과 인도, 북한도 이미 핵비확산조약을 어겼다. 원전은 꾸준히 관리하지 못하면 아무리 안전한 설비라도 고장 나는 건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러시아, 프랑스, 일본, 중국은 국가차원에서 전폭지원하고 있지만 민영회사를 앞세운 미국은 상대적으로 약세에 놓일 수 있다. 한국이 하루 빨리 비리와 불신을 뒤로 하고 국민과 함께 원전을 다시 추슬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이 믿어야 국가가 있고, 국가가 있어야 원전이 바로 선다.

세계는 바야흐로 에너지 냉전 중, 오늘도 소리 없는 총성이 울리고, 원자력은 열전을 치르고 있다.

자, 그럼 우린 어디쯤 와 있을까? 3년이 지났는데도 결코 이웃나라 얘기가 아닌 후쿠시마 사고는 현재와 미래 진행형이다.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지워지지 않을 원자력의 상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고 여파가 아직까진 당초 예상보다 덜한 듯하다.

한국은 원전 비중이 높은 나라임에도 후쿠시마와 부품비리는 원자력을 뒤안길로 내몰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신고리 5, 6호기 전원개발 사업계획 승인은 모처럼 반전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끝자락부터 여러 원전이 시험성적 위조나 불량부품 사용 등으로 멈춰서고, 대정전이 촛불처럼 나라를 흔들리게 한 적도 있었다. 자동차, 철강, 전자 등 전력 다소비 국가로서 우리에겐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국은 세계 굴지의 원자력 강국, 그러나 후쿠시마에 이어 부품비리로 원전에 대한 국민신뢰는 떨어지고, 급기야 국가에너지기본계획 원전 비중은 전 정부의 2030년까지 41%에서 2035년까지 29%로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20년 최소 16기를 새로 짓게 된다면 현재 용량의 두 배 가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가파른 전력사용 증가로 전체 발전량의 30%를 밑돌지만 화석연료를 묶어두는 데는 기여하리라 본다.

140만 kW 신고리 5, 6호기는 현재 건설 중 5기, 계획 중 4기에 이어 2020년 완공 예정인데 탈핵 진영에선 현 정부의 원전에 대한 국민불안을 도외시하는 처사로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간 비리와 고장에도 불구하고, 국내 동서해안 원전본부는 이젠 환골탈태하며 국민과 함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동력으로 돌아오고 있다. 세계 원전시장은 변화와 도전을 예고하며 우리의 발 빠른 대처와 응전을 기다리고 있다. 지구 온난화 대비, 원자력의 기술과 비용, 부지와 시점에 대해 공론화할 때이다.

작년 초 찬반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판도라의 약속’은 원자력이 괴담처럼 죽음과 질병, 폭탄과 사악 산업이 결코 아니었음을 반핵에서 찬핵으로 돌아선 굴지의 활동가들이 생생하게 증언하는 기록영화이다. 첫 장면의 탈핵 외침은 나머지 89분의 반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원자력은 석탄에 비해 인체에 해가 덜하다. 원전연료의 방사선에 따른 발병률은 화석연료의 폐기물로 인한 사망률보다 훨씬 낮다. 무기 제조는 원전 건설과 사뭇 다르다. 후쿠시마, 체르노빌, 쓰리마일을 뒤로 하며 이젠 원전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엄격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절체절명의 안전성과 폐기물 문제를 한꺼번에 풀 수도 있을 4세대 원자력시스템, 안전하면서도 싸게 지을 수 있는 중소형 원자로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고리로부터 시작해 임시저장조를 메워가는 사용후연료의 관리방안에 관해서는 현재 공론화가 진행되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20세기 난제를 21세기 전술로 풀어가야 한다. 원자력이 세계 기후변화에 맞서가는 버팀목이 될 건지, 아니면 국가 백년대계를 흩트리는 걸림돌이 될 건지 가늠해야 한다.

이제 지구촌 원자력산업에 드리운 구름 너머 햇빛을 되찾아야한다. 특히 국민소통을 머리에, 안전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돌아보건대 2011년 후쿠시마 사고와 2013년 국내원전 비리가 주는 뼈저린 교훈은 기술의 실패가 아니었다. 인원과 절차, 조직과 구조가 문제였다. 지배구조가 무너지고, 국민신뢰가 떨어지고, 시민소통이 막혀버린 게 원인이었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원자력 안전띠를 졸라매고, 일반국민과 지역주민을 찾아나서야 한다. 방사능 낙진과 심리적 붕괴를 생각할 때 원전사고는 규모나 결말과 상관없이 국경을 넘어간다. 국민신뢰와 주민지지를 되찾지 않고서 원자력은 발붙이기 힘들 것이다.

이쪽에선 재생과 효율만으론 에너지 난제를 해결할 수 없고, 원자력은 원료가 넘쳐나고 조그만 걸로도 엄청난 힘을 낼 수 있으며, 앞으로 방사성 물질을 없앨 기술이 나올 것이고, 안전하고 깨끗하며 확실하고 경제적이라 한다. 저쪽에선 원자력이 기후변화에 맞서기엔 역부족이고, 너무 비싸며, 폐기물 문제는 여전하며, 핵확산 우려를 부추기고, 안전문제가 있으며, 대안이 이미 있거나 곧 나타날 거라 한다.

이제 한결같이 대화로 앙금을 풀고, 부스러기를 털고, 실타래를 헤쳐 틈새를 좁혀야 한다. 그러려면 성숙된 자아의식과 토론문화가 필요하다. 힘겨루기 식, 해묵은 반목과 비난은 백해무익. 사리와 사욕을 배제하고, 과학과 기술로 접근하고, 타인과 이견을 존중해야한다. 값싼 애국심이나 비뚤어진 애향심은 능사가 아니다. 한 번 말하되 두 번 듣는 끈기가 필요하다, 입은 하나이되 귀는 둘이니. 우리 사회는 소수나 반대의견에 가혹하다. 하지만 모두 그렇다고 할 때 아니라고 외칠 수 있는 목소리도 필요하다. 그래야 정반합(正反合)이 나온다.

안전은 아무리 비싸더라도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최우선시해야 할 가치로 사업자는 이윤창출에 앞서 안전제일을 체질화해야 할 것이다. 안전과 품질은 원전 첫 날 가동부터 마지막 날 폐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살펴야 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원전에서 녹지까지 대장정에 늘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의 지속가능한 원전은 내일의 안전품질을 보증하며 건설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이라 함은 만질 수도, 보일 수도 없는 무형의 자산으로, 딱딱한 기술에 스며드는 따끈한 애정이어야 한다.

지구는 살아 숨 쉬는 생명체, 생태계는 서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생명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그 속에서 생명은 고유 가치이고 절대 존엄이다. 이제 우리는 어쩌면 편익만을 탐하다 위기를 초래하는 건 아닌지 숨고르기 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홍익과 풍요만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기술의 잘못된 사용은 인간생명과 사회기반을 흔들 수도 있고, 원자력은 그러한 과학기술의 한 가운데 있다. 원전 밀집도가 높은 한국은 더욱이 원자력 사고와 방사능 재난에 선제적으로 맞서야한다. 지구는 인류만이 사는 공간이 아니다. 생물과 함께 살아가야 할 터전이자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누리이다.

풍요와 안전은 두 날개와 같아서, 원전을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안전은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 복은 조심할 때 오고, 화는 자만할 때 온다고 했다. 복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기도 하는 원자력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원자력은 잡고 있기도 어렵지만, 놓아버릴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소모적이고 공허한 찬반 논쟁보단 원자핵을 안전하게 잘 다루어 함께 잘 살기를 모색하는 길뿐일 것이다. 그러나 지상 600기에 가까운 원전 모두 탄탄하게 운영유지되고, 빈틈없이 사후관리되고 있는지 세계인은 반신반의하는 게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인류가 원자핵을 자유자재로 다룰 과학기술과 안전풍토가 높은 수준인지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안전의식이 결여된 원전정책은 자연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마련이고, 그 피해는 천문학적일 수도 있다.

어두운 것은 달콤한 법이다. 편익에 도취되면, 위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지난 100년 인류가 사용한 에너지와 물질의 양은 그 이전 전 인류 역사상 사용했던 총량보다 많다고 한다. 그만큼 일상생활은 풍요로워졌지만, 반면에 지나친 에너지 사용에 익숙해져,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킨다면 파국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가 더 향유하기 위해 미래마저 저당잡고 사는 것은 아닌지, 건설과 발전에만 몰두하다 몰락을 자초하는 건 아닌지 헤아려볼 일이다.

때로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멈춰서야 할 때가 있다. 원자력에 관한 한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원전사고의 피해는 한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국가 간 긴밀한 공조에 우리가 동북아를 중심으로 앞서 나가야 한다. 괄목상대 중국, 교각살우(矯角殺牛) 일본, 천방지축 북한, 거안사위 한국, 이제 동상이몽에서 깨어나 일사불란하게 나가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건설 위주에서 안전한 운영과 해체로 눈을 돌리는 지혜도 필요하다. 원전은 탄생문화 못지않게 장례문화의 정착이 중요하다. 해체는 건설에 비해 충분한 관심을 끌지 못해 경제성이나 안전성에 대한 연구나 기술 축적이 일천한 실정이다. 태어나는 것은 죽게 마련인데, 건설을 말하면서 해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태어나는 것이 기쁘다면, 죽어가는 것도 아름다워야 한다. 안전한 퇴로도 마련하지 못한 채 증설하는 것은 장님이 촛불을 든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계의 해체시장규모는 향후 50년간 매년 20조 원이나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전의 안전해체를 확실하고 투명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명분과 실리를 세계인, 특히 정치가와 경제인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게 설득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원자력을 두려워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두려워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원자력의 슬기로운 이용과 관리는 21세기 새로운 화두이다. 국토보전과 홍익인간에 안전한 걸음을 뗄 수 있는 정책의 유연한 변화를 희망하며, 안전문제와 해체기술에 대한 해법을 모색해 원자력문화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4월은 더 이상 잔인한 달이 아니다. 변화와 도전 너머 국민과 함께 오늘을 지속하고 내일을 약속하는 소통과 상생의 여로에 오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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