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원자력 뿌리를 찾아서-(1)
문교부 초대 원자력과 과장 윤세원 박사

본지는 우리나라 원자력 역사의 5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호부터 ‘대한민국 원자력 뿌리를 찾아서’라는 시리즈를 게재한다. 반세기의 원자력 역사를 맞이한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원자력 강대국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증명할 생생한 증언 자료가 없어 항상 안타까움을 접해왔다.
이에 본지는 1950년대 중반 원자력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최초로 ‘원자력의 씨앗’을 심은 ‘제1세대 원자력 인물’란을 마련해, 그 당시 원로 원자력 인물들의 애환(哀歡)과 비사(秘史)를 적극 발굴 보도키로 했다.
‘제1세대 원자력 원로’께서는 현재 나이가 팔순인 여든에 넘어서면서 잘못하면 원자력 역사가 끊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본지는 조청원 전 교과부 원자력 국장과 함께 원자력 원로들을 지면에 초청해 후배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가교역할에 충실할 계획이다.
‘대한민국 원자력 뿌리를 찾아서’란의 첫 원로는 1957년 우리나라 최초 원자력 행정부서인 문교부 원자력과 과장을 지낸 ‘윤세원 박사’를 지면에 초청했다.
윤 박사는 서울대 교수 재직 중 문교부 원자력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첫 원자력행정책임자직을 역임하면서 △ 원자력 법 제정과 행정체계 수립 △ 원자력연구소 설립 △ 해외 원자력 인재 양성 등에 적극 나서 원자력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첫 씨앗을 뿌린 최고의 산 증인이다.
윤 박사의 생생한 증언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질문을 빼고 기사화 했다.(본지는 원자력 전문매체로서 원로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증언을 녹음해 영구 보관한다)

문교부 초대 원자력과장이 된 동기

서울대 부교수로 재직하던 195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만든 최규남 박사가 나를 강제로 원자력과 과장으로 강제로 끌고 갔지(웃음). 그 당시 서울대학에서 월급을 8만원 받았는데 공무원으로 가니까 월급이 절반밖에 안 돼. 하지만 ‘원자력이 아니면 이 나라는 살길이 없다’라고 생각해 흔쾌히 수락했지.
1955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자는 세계 정책을 제창했고 그 일환으로서 우리나라도 참여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있었지. 그래서 미국 국가원자력연구기관인 국립아르곤연구소에서 세계각국의 중견학자 및 기업체 간부들과 함께 10개월간 훈련과정을 아르곤에서 받았서. 제1회 때는 정부에서 연락 안와서 못가고, 제2회 때 정부에서 참여하라고 해서 징발 당했지(웃음).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국비유학생 이라 할 수 있지.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1천만 달러도 수출을 못 하던 어려운 시절이었거든. 우리나라는 제일 가난할 때 원자력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아르곤 연수에 참여한 브라질 등 세계 22개 나라 중 우리나라가 제일 가난했지. 학비는 총 6천불 이었는데 학교에 내는 돈이 2천불, 미국 연구소에 내는 돈 1천불을 제외하고 나머지 3천불을 가지고 10개월 동안 생활했지. 그리고 57년에 이승만 대통령님의 우리나라 첫 원자력 행정부서를 만들라는 지시로 원자력과가 생기게됐어. 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창한 원자력의 평화적 독트린 따라 원자력 행정체계를 어느 부서에 두느냐가 문제였지. 그때는 원자력을 갖다 놓을 데가 마땅히 없는 거야. 상공부도 그렇고 그래서 과학기술교육 담당부서인 문교부에 원자력 업무를 담당케 한 거야. 기술교육국장으로 물리학 박사였고 나를 가르친 스승인 박철재 박사님이 계셨어. 그때 장관인 최규남박사가 나를 강제로 와서 하라 그러면서 내가 파리에서 열린 동위원소국제회의에 갔다 오니까 발령을 내버렸다.

원자력연구소 건립 역사

미국서 지원받은 35만불 가지고 우리나라는 원자력연구소와 원자로를 구매하기로 결정한 것이야. 초창기 원자력법을 제정하고 원자로를 들여오는 것 그리고 원자력연구소를 만들기로 하거야. 그런데 원자력 연구소 부지를 찾는 게 쉽지 않았어. 당시 외국의경우 원자력은  산속 조용한 장소에서 많이 하는 그런 풍조가 있어서 나한테 압력이 오는 거야. 제일 먼저 안양근처 박달리 지역을 물색했어. 박달리는 일제강점 때 포탄을 감춰두는 탄악고가 산속 깊이 있었어. 안양 박달리 근처를 찾아갔다가 서양 사람들이 와서 이런 산속에다 하느냐고 못 마땅해 하기에 10년 이내에 한국이 발전하면 먼곳은 아니라고 양해를 구했지. 미국에 전체 계획서를 제출해야만 미국으로부터 35만불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연구소 부지 확보가 관건이었지.
그 당시 35만불은 큰 돈 이지 아마 지금은 3500만불 정도 될 것이야. 그런데 미국으로 건너가 원자로 구매 계약을 하고 오니까 박달리가 미군이 점령해서 산꼭대기에 철조망을 뺑 둘러 쳐져 들어가지도 못하게 해 놓았어. 한마디로 미군부대한데 연구소 자리를 뺏긴거야. 할 수 없이 국방부장관을 찾아뵙고 이 왜 뺏겼냐고 항의했더니 송파에 군행정학교가 있는 160만평을 연구소로 쓰라고 해서 거기를 가보았지.
며칠을 돌아다니면서 원자력연구소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예산 3억5000만원을 가지고 토목 도로 전기 수도시설 등을 놓는데 턱없이 부족해. 그리고 원자력연구소 부지로서 또 지금 정부청사자리인 과천 거기가 좋았다. 관악산은 미국에서도 대포가 떨어져도 안 맞는다고 할 정도로 괜찮았어 그래서 그 땅을 사려니까 땅 살돈이 없어, 할 수 없이 사방을 둘아 다녔는데 서울대학교 공과대(공릉동)가 29만평인데 1호관 2호관 3호관 4호관이 있었는데 서울대 총장인 윤일선박사를 쫒아가 10만평만을 달라고 요청했지. 윤일선박사가 원자력에 대한 이해가 깊었어요, 내가 강의할 때 늘 와서 대학 총장인데도 원자력에 강의를 듣곤 했지. 나도 선뜻 그래서 13만평을 받았는데 일본의 도까이무라 연구소를 가보니 50만평은 최소한은 있어야지 내 맘에 차는 거야. 태능 선수촌 뒷산을 전부 사려고도 했지
그다음에 원자로를 미국서 사와야 했는데 무얼 사올까 고민했지.
그런데 미국서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제너럴일렉트릭 트리거마트II야. 이원자로를 사야겠다 싶어서 우선 계약부터 했어. 그런데 35만불 집행하려고 하려니 재무부 모 고위인사가 자기한데 한마디 상의도 안하고 돈을 가져갔다고 해서 무척 싸웠지. 이 원자로는 원래 35만불이지만 2만불은 콘크리트치는 비용으로 쓰라고 해서 미국회사서 말해 중앙산업에게 우리나라 최초로 원자력 콘크리트 토목공사를 맡겼지.
트리가마크 연구용원자로는 우리나라 원자력 최초의 기념할만한 건물이라 건물 아래부분은 돌로 만들어 정성들여 붙였지.
원자로 건물을 건축한 사람인 김주복씨인데 참 많이 싸웠어. 후에 삼일빌딩과 올림픽공원 정문 날개등을 설계한 유명한 사람인데 원자로를 지으면서 동갑내기인 김주복씨 하고 싸우면서 무척 친해졌어.
초창기 원자력연구소 조직을 만드는데 총무처에서 골격 안을 만들고 내용 구상은 내가 했어. 그런데 총무처장하고 나하고 대판 싸움을 했지.
원자력연구소 조직으로 1급 연구관이 3명, 원자력연구소 소장까지하면 4명, 2급은 12명을 넣고 3급은 40명 이정도 규모의 연구소를 구상했는데 총무국장이 깜짝 놀라는 거야.
이게 무슨 연구소냐 . 그 당시 문교부에 장관하고 차관이 2명, 국장이 4명 3급이 열 댓명 전부해야 간부직이 30명정도인데 놀랠 수밖에.
하지만 이정도 규모가 되지 않으면 연구소가 되지 않아 밀어 부쳐 끝내 정원을 다 받아냈어.
그리고 총무국장하고 이태규 박사님를 모셔야 하겠는데 2급 공무원은 그렇고 1급을 드려야 하지 않겠냐 해서 결국 이겼지.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법 초안 제정
원자력과장으로 부임하면서 원자력 연구그룹을 만들었어. 원자력 연구그룹은 이창건 박사와 작고한 현경호박사 등 물리학 박사 7~8명을 포함해 총 12명으로 구성됐지. 이들 연구그룹은 전 세계의 원자력법을 조사해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법 초안을 만들어 국회에 상정했지.
내가 미국으로 원자로를 사러 가기 전에 박철재 박사를 통해 문교부를 거쳐 국회문공위에다 제출했어. 그런데 원자력에 대해 몰라서 미국서 갔다 와도 문공위에 그대로 있는 거야.
1년 가까이 지연된 원자력법을 다시 문공위와 상공위원이 함께 참여하여 약간의 자구 수정한 후 58년도에 통과시켰지.
그 당시 원자력과는 정식직원이 5명 있었는데 정근영이라고 사무관이 있었지. 그리고 나중에 동양고속터미널 사장하던 이민하 직원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해서 내가 데려다 같이 일하였어.
한미원자력협정은 내가 문교부 들어가지 전에 외무부에서 했지.
그 당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 제안으로 원자력전시회를 여는등 계몽해야 했거든. 미국서 만든 자료를 가지고 덕수궁서 원자력에 대한 계몽사업도 많이 하고 내가 직접 강연도 많이 했지. 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매주 토요일에 가서 원자력에 대해 얘기도하고. 국민들은 원자력에 대해서 원자탄이 일본을 망하게 했으니까 생각했고 우리나라는 지하자원도 없고 그래서 원자력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어.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만나 이야기 해보면 원자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히 강하셨지.
우리나라에서 원자력은 59년에 시작됐지만 원자력원장은 국무회의에도 참석할 정도로 대단했지.
한 가지 내가 실수한 것이 있다면 원자력연구소 준공 날짜를 너무 이르게 잡아 공기에 쫓겨 공사를 서둘렀다는 것이야.
원자력 위원들이 언제 준공하느냐고 하도 괴롭히는 바람에 한 겨울에 이틀 밤을 콘크리트 치고 너무 공기를 단축시켰어.
우수한 인재 양성에 많은 투자가 중요하다고 봐.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님하고도 이 문제로 논란한 적이 있지. 구라파 등에 유학을 보낸 이동영(포항공대), 이상수(KAIST), 김태봉(고려대)등이 있었는데 이런 좋은 사람들이 1800불이 없어 중도에 한국으로 돌아올려고 해서 해외 유학비를 도와달라고 이승만 박사께 표지와 문구만 약간 수정해서 결재를 3번 올렸던 일이 있었지. 왜 돈을 보내 주냐고 이승만 대통령님께서는 보류하시고 대통령 비서실장은 똑같은일을 여러번 반복한다고 건방지다면서 불러다 훈계하데. 그래서 세 번째는 직접 이승만 대통령님을 찾아뵙고 ‘무식한 천명 보다도 똑똑한 인재 한명이 중요하다’고 떼를 써 결국은 유학비 결재를 받아냈지.
그간 최초의 이야기를 묻어두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얘기로 남기게되니 이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네그려(눈시울을 적시시며 후배 원자력국장출신인 조청원박사의 두손을 꼭 잡으며 원자력 사랑의 깊은 정을 나누어 주셨다)
끝으로 우리나라처럼 에너지가 없는 나라는 인재양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해. 인재양성에 국가가 많은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해야 해. 그리고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먼 장래를 보고 국가정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서울대 교수로 있다가 문교부 행정관청에 들어가 한 달 쯤 지나니까 저만큼 보여, 그리고 두 달이 지나니 행정구조가 보여, 반년정도가 지나니까 어느정도의 흐름을 알게 되었어. 과장자리는 적어도 10년은 변함이 없도록 정책을 세워야 하고, 국장 은 20년 변함이 없어야 해, 특히 장관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50년 더 나아가 100년을 내다보고 이 나라에 있어야 할 터전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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